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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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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그 특유의 센치한 분위기와 뭔가 있어보이는 "실존주의"라는 사조에 힘입어 꽤 많은 팬층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보여주는 현대와는 맞지 않는 도덕관념과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등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 역시 많이 받는 책이다. 

사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걍 아무 생각 없는 한량이, 아무 생각 없이 사람 쏴죽이고, 아무 생각 없이 재판 받다가, 갑자기 급발진 한다음에 사형당하는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살인과 사형은 극단적이긴 예시긴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량 짓하다가 인생 말아먹을 뻔한 적은 다들 한번씩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조금 성격이 독특할 뿐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왜 이방인이 대단한 문학작품으로 칭송받는 지 알 수 없다. 이방인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에 실존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1.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흐름이라고 한다. 사실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하지만 정작 실존주의 철학자가 누구냐 하면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키에르키고르는 신학자고, 니체는 실존주의로 묶기는 좀 그렇고, 카뮈나 사르트르는 문학가의 느낌이 강하고 하이데거 정도? 사실 실존주의는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기 보단 하나의 사상적 충격에 가깝긴 하다.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 전체가 앓았던 집단적 우울감이, 독특한 사고방식을 탄생시킨 것이니까. 


그 실존주의의 맥락 안에서, 카뮈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제국이 실패하고 해체되는 경험을 한 전 유럽인 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의 길은 실패했는데, 과연 이제 뭘 해야 할까? 한 때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고 있고, 우리는 그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진지하게 신을 믿고 있지 않았다. 인간이, 신을 죽여버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신이 사라진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소망해야하는 걸까?


2.


그렇다면 이방인은 신을 잃어버린 근대의 개인들을 위한 새로운 철학 체계를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아쉽게도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을 위한 근대의 철학은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을 잃어버린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데카르트가 대답했으며, 신을 잃어버린 인간이 새로운 십계명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칸트가 대답했고, 신을 잃어버린 인간이 새로운 권위를 창조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홉스가 대답했다. 인간은 신을 잃어버렸지만, 이성이라는 무기로 신의 소명을 대체했다. 신을 잃어버린 시대의 철학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그저 근대가 만들어놓은 "신 없는 세계"를 그저 낭만적으로 되풀이한 걸까? 단순히 또 그렇게 보기는 좀 힘들다. 뫼르소는 근대적 개인의 상징인 파우스트나 아하브와는 다르며, 신이 없는 시대의 개인인 도스토엡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나 스타브로긴과도 결을 달리한다. 뫼르소는 파우스트나 아하브처럼 세계를 정복하며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근대의 야망 따윈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신을 대체한 이성의 과제에 냉소를 보내는 듯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니힐리즘을 논리로 쌓아올린 이반 카라마조프나 스타브로긴과는 달리, 뫼르소는 이성적이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충동적이며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뫼르소는 신을 잃어버렸지만, 신을 대체하는 이성과 철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도 이성도 잃어버린 그의 눈동자에는 무엇이 차있는가?


3.


태초에 신비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신비의 최상층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신비가 있었다. 영원한 순환의 상징이자 빛과 생명의 근원, 천구의 최상층에 위치한 신비. 태양이다. 한 때 인류가 숭상했던 태양의 빛은, 칸트가 그만큼 아름답다고 칭송한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신비는 없으며, 지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신비를 잃어버린 인류는 신과 자연의 이야기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법이라는 이야기, 도덕이라는 이야기, 민족이라는 이야기, 진보라는 이야기, 계급이라는 이야기... 이런 허구의 이야기들에 눈이 먼 인간은 자연을, 동물적 감각을, 행복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아무도 태양을 보면서, 그 엄청난 에너지를 순수하게 느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태양이라는 신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카뮈가 강렬한 태양빛을 통해 본 것은 무엇일까? 그는 다시 신비를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순수한 신비.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해야 한다는 "도덕"과,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회"라는 상상의 이야기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그 순수한 태양빛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의 만남으로 눈에 난 비늘이 벗겨진 바울처럼, 태양의 빛이 뫼르소에 눈을 덮은 비늘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마침내 무지에서 깨어난 바울이 예수의 사도가 된 것처럼, 근대의 미망에서 깨어난 뫼르소는 태양의, 신비의 사도로 사회의 거짓말을 불태워 버리려 한 것이었다.


카뮈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활자와 지식의 산 따윈 존재하지 않던 순수했던 시절로. 복잡한 허구의 것들에 집착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연을 몸으로 느끼며 사랑을 하고 운동을 하는 삶. 뫼르소가 보는 세상에서, 논리니 법칙이니 철학이니 그런 복잡한 거짓말들은 없었다. 그러한 기만적 상상력의 베일을 벗기자, 그는 진정한 세상을,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햇빛이 강렬해서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는, 단순히 살인만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햇빛이 주는 진정한 생명력의 은총을 받고, 고대로 돌아간 것이다.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사냥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던, 지극히 동물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적인 그 시대로. 기독교니 근대니 하는 온갖 이상한 소리들이 존재하지도 않던 에전으로.


4.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든 않든 간에 모두 근대의 산물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환경은 그때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그것은 단순히 환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우리의 뇌는 법이니 국가니 철학이니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노래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래하고, 춤추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자연과 투쟁하며 뛰고 승리를 노래하며 춤추는 삶.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너무나도 쉽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먹을 걸 사냥할 필요도 없으며, 추위에 떨면서 잠을 잘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쉽게 살 수 없다. 회사니 학교니 우리의 조상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빠져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인내심과 주변 시선을 인식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나조차도, 고등학교 때는 공부해야 하며, 20대 때는 청춘을 즐겨야 하고, 연애도 한 번씩 해봐야 하며,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테제에 복종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푸코가 말한 "장치"에 의해 작동된다. 푸코의 장치는 인간이 결코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군대, 회사, 병원, 학교, 감옥 이 모든 곳에서 근대의 규율권력은 그 실체를 은폐한 전능한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뫼르소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권력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자유한 진정한 자유로운 개인이니까.


5.


카뮈는 신을 잃은 개인에게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주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는 신을 잃은 개인에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주려고 한 것이었다. 신을 잃어버린 개인에게 새로운 신비를 가져다주려고 한 것이었다. 푸코가 말한 "장치"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카뮈의 기획은 성공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장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 "장치"가 태동하기도 전의 태고의 지혜를, 무지라는 은총을 받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 모두 답을 안다. 이미 우리는 근대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 뫼르소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건, 뒤집어 말해서 우리는 뫼르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뫼르소가 매력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우리는 결코 우리가 "장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차가운 현실만을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