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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민음사, 13쪽

ㅡ내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라는 성찰과 같은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작중 화자 ‘오바 요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요조, 그는 어릴 때부터 배가 고프지 않아 누군가 권하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먹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거절하지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선택하지도 못했다.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뜻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고, 매일같이 재앙 열 덩어리와 함께 지내야만 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더 나아가 그의 유년기는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해가 안될뿐더러 두렵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겐 선택과 거절의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인간도 그의 선택이나 거절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는 ‘익살’이라는 최초이자 최후의 구애를 인간에게 하게 된다. 그는 공포와 두려움에 절어있었기 때문에-그토록 어린 나이에-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꾸중을 하게 되면 그것이 ‘만세일계’로 느껴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익살이라는 것을 하게 된 듯싶다. 그의 익살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으며, 그는 소위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익살은 학교로 가서 만나게 된 ‘다케이치’에게 들통나버렸다. 그 이후 그는 지옥의 업화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다케이치 옆에 붙어 그를 감시할 요령으로 그를 빗속에서 끄집어내 자기가 사는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다. 요조는 다케이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그림을 보게 되는데, 것은 도깨비 그림과도 같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졌고, 그는 그 그림에 빠져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 라고 말하게 된다. 다케이치와 지내면서 그는 다케이치에게서 두 가지 예언을 듣게 되는데 하나는 여자가 홀딱 반할 거라는 예언과 또 하나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라는 예언이다.

그는 미술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도쿄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도쿄에서 학업에 열중하지 못하고, ‘애교심’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마쳐 버린다.

그는 어느 화방에서 ‘호리키 마사오’ 라는 사람을 만나 술과 담배 창녀와 전당포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는 요조와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요조와 동류였다. 호리키는 돈을 효율적으로 잘 썼으며 어색한 침묵에 빠지게 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요조와 그럭저럭 어울리게 된다. 요조는 호리키와 다니면서 그야말로 자신과 동류인 창녀들과 놀았고, 창녀들도 그에게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보낸다. 이러는 도중에 요조는 일종의 역겨운 기운인, ‘여자를 잘 다루는 도사’ 냄새가 배어 버리게 된다. 호리키에게 이러한 사실을 지적받자 그는 굴욕 비슷한 씁쓸함을 느낌과 동시에, 창녀들과 같이 지내는 일에도 흥미를 잃게 된다.

그는 호리키를 통해 공산주의 독서회(R.S)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비합법적인 그 모임과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삶’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일 밤 잠을 못 이루며 지옥에서 신음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쪽이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버지의 사정과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그는 하숙집에 혼자 지내게 되면서 궁핍해진다. 늘 돈에 쪼달렸고, 하숙방에서 혼자 ‘생활’할 능력이 없던 그는 거리로 뛰쳐나가 운동과 관련된 심부름을 하거나 호리키와 싼 술을 마시며 돌아다니게 된다. 그렇게 학업도 그림 공부도 포기한 채 살다가 연상의 유부녀와 정사 비슷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는 돈이 없다는 것과 운동과 관련된 심부름이 놀이하는 기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격심해지고 바빠져서 짜증스러운 감정을 품게 되었고, 결국 당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고, 그래서 죽기로 결심한다. 이 무렵, 그는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인간들의 자신감과 폭력을 못 미더워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조금씩 남들과 제대로 인사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즈음 그는 긴자의 큰 카페에 여급으로 일하고 있는 ‘쓰네코’ 와 정사를 나누게 된다. 그는 쓰네코와 지낸 하룻밤이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행복마저 두려워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 이라는 속담을 쓰네코에게 익살스럽게 말하며 결국 쓰네코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후에, 호리키와 술을 마시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왔는데 그곳에는 쓰네코가 여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호리키가 자신은 여자에게 굶주려있다고, 여급한테 키스할 거라고 그에게 말해왔기 때문에, 그는 아차 하는 생각에 빠진다. 그는 원래 소유욕이라는 것이 적었고, 그것을 주장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쓰네코는 자신의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아차 한다. 그것은 쓰네코의 처지가 가엾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호리키한테 더럽혀지면 자신과는 끝장난 거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리키는 이런 궁상 맞은 여자한테는 키스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위 속물들의 눈으로 보면 쓰네코는 키스 받을 가치조차 없는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고, 요조는 그 말에 청천벽력에 박살이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전례가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는 쓰네코에게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고 쓰네코가 사랑스러우면서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한다.

술에 왕창 취한 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맡에 쓰네코가 있었고 그는 쓰네코의 요청대로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여자는 죽었고, 요조는 살아남게 된다. 그는 병실에서 쓰네코가 그리워 훌쩍훌쩍 울게 된다. 그는 자살방조죄로 심문을 받지만 운이 좋게도 기소유예를 받고 넙치라 불리는 남자, 자신의 보증인으로 되어있는 시부타를 비참한 심정으로 검찰청 의자에 앉아 기다리게 된다.

이후, 그는 넙치의 집에 의탁하게 된다. 넙치는 요조를 보살피기로 했던 것이라 그에게 장래 계획 같은 것을 물어본다. 요조는 큰마음을 먹고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지만, 넙치는 그 답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조는 장래 계획을 상의하러 호리키 집에 가겠다고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물론 실제로 장래 계획을 상의하러 간 것은 아니고, 그저 넙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호로키의 집에서 그는 스즈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처음으로 정부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28살 여기자인 스즈코는 남편과는 사별한 지 3년째였고, 5살 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잡지 같은 곳에 자신이 그린 만화를 실으며 술과 담배를 살 정도의 벌이는 했지만, 시즈코를 벗어나 독립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점점 더 시즈코에게 기대는 형국이 되었다. 그의 불안함과 울적함은 더욱 더 심해진다. 이때 그에게 구원이 돼주었던 것은 시즈코의 딸 시게코였다. 시게코는 그를 아무 거리낌 없이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시게코는 그에게 “아빠, 기도하면 하느님이 뭐든지 들어주신다는 게 정말이야?” 라고 물어봤고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게코의 소원이 진짜 아빠가 갖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그 어린 아이에게도 적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 무렵 호로키가 다시 찾아오게 되었고 호로키는 그에게 세상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하지만, 그 세상이란 것은 그에게 호로키로 느껴졌다. 그는 세상이란 것은 결국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조금은 더 멋대로 굴게 된다. 그는 문득 스즈코와 시게코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그 두 사람을 망쳐놓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그 집을 떠나게 된다.

그는 교바시 근처 스탠드바 2층에서 또다시 정부와 같은 처지로 지내게 된다. 이때 그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된다. 여태까지 그가 느낀 공포는 미신적인 공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은 무서운 존재였다. 이 시절 그는 한 여자와 만나게 된다. 그 여자의 이름은 요시코로, 열일고여덞 정도 되는, 바 건너편 담배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그에게 술을 끊을 것을 권했고, 그는 요시코한테 치료를 받으면서 술을 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는 요시코의 하얀 얼굴,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의 숭고함,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린다. 봄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폭포를 보러 가야지 하고 결심하고 이윽고 곧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요시코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그는 ‘어쩌면 나도 차차 인간다운 존재가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절에도 호리키는 종종 그를 찾아온다. 그는 호리키와 옥상에서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와 반의어 맞히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는 이 놀이에서 ‘죄’의 반의어 쉽사리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죄의 반의어를 생각하던 도중 호리키가 배고프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요시코가 다른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어질어질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야 라는 말을 거친 호흡과 함께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옥상으로 도망치듯이 다시 올라온다. 그때 그는 노여움도 아닌, 혐오도,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는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아닌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다. 요시코가 더렵혀졌다는 사실보다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에게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된다. 그는 요시코가 숨겨놓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의식을 잃는다. 그는 병원에서 눈을 뜨게 되고, 그를 찾아온 마담에게 요시코와 갈라서게 해달라고 한다. 도쿄에 큰 눈이 내린 날, 그는 취한 채 골목에서 각혈을 하게 된다. 급한 대로 우선 적당한 약을 먹어야겠다 생각한 그는 근처 약국에 들어갔다가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어느 부인과 마주친다. 그는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 약과 모르핀 주사액을 얻는다. 그는 그 이후 술을 끊게 되지만, 오히려 모르핀에 중독되고 만다. 그가 이 약품이 불결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 것은 이미 완전히 중독자가 되어버린 이후였다. 그는 약품을 손에 넣고 싶은 일념에 춘화 모사를 시작했고, 약국 부인과 추잡한 관계까지 맺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창피에 창피를 더하고, 추잡한 죄에 한심한 죄가 겹치고 고뇌가 증폭하고 격렬해질 뿐이라는 비탄과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집과 약국 사이를 미치광이처럼 왕복할 뿐이었다. 그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써서 자신의 사정을 고백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없자 그는 더욱 초조해지고 불안해져 약의 양을 늘리게 된다. 그가 자살을 결심한 어느 날 호리키가 찾아온다. 그는 자동차에 태워졌고, 어느 요양원 같은 곳에 도착한다. 요시코는 갈아입을 옷 몇 가지와 그 약품을 건네준다. 요시코는 모르핀이 정말로 약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아니, 이젠 필요 없어.” 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거절하게 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사실 정신 병원으로 그는 죄인이 아닌 미치광이가 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인간 실격 된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안 계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큰 형의 요구에 따라 어느 시골로 가서 요양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라는 말을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끼게 된다. 그때 그 나이 스물일곱이었지만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마흔 살 이상으로 본다.

ㅡ소감

1. 인간 자아 형성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만나 성관계를 맺고,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난자에 착상해 여성의 배 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인간의 탄생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이 생명에게는 안과 겉의 구분이 없다. 합리적인 능력, 이성도 없다. 이 생명체는 그저 살아있을 뿐이다. 이 생명체는 곧이어 모태로부터 영양분을 섭취 받게 된다. 맨 처음으로 겉의 것을 양분 삼아 안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생명체는 생명 활동을 하게 되고 자신의 몸을 키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그 구분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가 그런 활동을 끝마치고 세상으로 나올 때, 그는 겉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는 살기 위해 그 자신의 생명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안으로 섭취하는 행동을 욕구하며 취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처음으로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생긴다. 선과 좋은 것은 그 생명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 나쁜 것과 악은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좋은 것과 선을 구강기를 통해 자신의 안으로 섭취하는 행동을 반복하여 행하고 나서, 그것들은 곧 결정화된다. 아직은 ‘미성숙한 자아’라는 것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 자아는 혼돈한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효율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능력을 키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인간 이성은 좋은 것을 찾아내고 나쁜 것을 배척해낸다. 그는 자신에게 좋은 것(최초의 영양분인 어머니, 맛있는 음식, 편안함, 좋은 감정을 유발하는 것 등)과 자신을 동일화 하고, 자신에게 나쁜 것(최초의 타자인 아버지, 맛없는 음식, 불편함, 나쁜 감정을 유발하는 것 등)과 자신을 분리한다. 그의 자아는 더욱더 결정화 되고 이제는 ‘어엿한 자아’가 태어난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이 어엿한 자아는 곧 어떤 성적인 것을 느끼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된다. 첫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바이의 왕이다. 테바이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신탁을 때문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산속에 버려졌다. 하지만 목동에게 발견되어 요행히 살아남았고 이웃나라의 왕자로 성장하여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바이의 왕위에 올라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자아는 최초의 영양분인 어머니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로 그의 욕구가 좌절됨을 느끼며, 아버지를 없애고 싶어 한다. 쾌와 불쾌의 감정이 더욱 단단해져서, 불쾌의 것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욕구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아는 너무나도 약하고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에 반면, 아버지는 강하고 명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아는 그 아버지에게 공포를 느끼게 된다. 자아의 공격성과 소유욕은 아버지에게 거세를 당해, 그 내면으로 섭취되어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아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하며 그와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자 한다. 그러는 동안 이 자아는 양가적인 성격을 취하게 된다.

3. 실존의 조건, 불안

한 생명의 탄생은 생각보다 단순할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탄생은 생각보다 복잡할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지러운 사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논리로 이뤄지든 간에, 우리는 실존한다. 인간에게 인간의 본질이 있고,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기를 실격당한 요조의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에게 인간의 본질은 없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생을 걸쳐서 해야만 한다. 정해진 길도 없고, 어디에 기댈 곳도 없는,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 이 불안감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자격일 지도 모르겠다.

4. 허무주의, 데카당스의 극복

허무주의는 18~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사상이다. 그때의 유럽은 잦은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시대가 많이 혼란스러웠다. 절대적이다 라고 믿어왔던 가치가 몰락하고 다시 일어서고, 최고의 가치가 볼품없어지는 시대. 그동안 믿어왔던 합리적인 이성, 도덕적-형이상학적 이상의 몰락. 사람들은 세상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곧 그 무엇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인간의 길은 암담할 뿐이다 라는 허무주의의 도래로 이어졌다. 목표도 없고, 구원도 없다. 우리의 끝은 결국 죽어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저 무만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실상도 이때의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한 인간의 생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회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신은 죽었다.” 라는 말을 한 철학자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철학자다. 그는 이 말을 함으로써, 그 당시 유럽 사회에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인 절대가치, 최고가치에 대해 파괴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그동안 믿어왔던 가치를 부수고, 져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 새로운 가치는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고 창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니체가 내세운 개념들이 있다. 위버멘쉬(초인)와 영원회귀다. 위버멘쉬에 대해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니체에게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들이 그러듯이 끊임없이 변하고, 생동하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야만 하는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즐겨야만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명령하고 도덕을 짊어지우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우리는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도덕을 창조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에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고통 속에는 행복의 씨앗이 심어져있기 마련이다.

영원회귀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만약, 모든 날들이 반복된다면? 매 순간이 되돌아오고, 어제가 반복된다면? 시간이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둥근 고리의 모양을 하고 있다면? 나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진보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허무에 빠진 자에게는 이러한 사실은 말 그대로 생지옥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또, 바로 직면한 사태만 버틴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도 같을 것이다. 매 순간이 부정되어야 할 것이며, 삶의 모든 것의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영원회귀의 둥근 고리는 허무에 빠진 자들에게 무한한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위버멘쉬에게는 이 영원회귀는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된다. 위버멘쉬에게 매 순간이 반복된다는 것은, 매일 같이 몰락할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고, 또 이는 매일 같이 창조의 순간이 도래한다는 뜻이 된다. 그에게는 매 순간이 긍정되어야 할 것이며, 삶의 모든 것의 가치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가치가 부정되는 사회, 혼란과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온갖 조소와 경멸 속에 흔들리고 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매일매일 짐을 짊어진 낙타처럼 이 광활한 사막을 방황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서로 싸우고 혐오하는 지경이다. 참으로 허무한 세상이다. 이 허무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허무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창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이런 질문들은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다시 허무로 돌아가게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그것은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은 사태다. 결국, 이 질문은 죽느냐 사느냐라는 질문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