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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가는 어떤 주제를 말하려 했을까?

장강명 작가가 '표백'에서는 개인이 자아실현도 사회변혁도 하기 힘든 꽉 짜인 현대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을 택했던 인물을 그렸다면, 이 소설에선 마찬가지 이유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인물이 자신을 모욕한 인물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개체성 독자성을 찾고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찾았다고 착각하는...이 옳겠다) 인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표백과 이 소설은 주제면에서 상통한다. 표백의 속편격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백에서 말했던 한국사회의 가치 부재와 목표 상실의 기원이 1990년대말과 2000년 무렵으로 소급한다는 걸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마지막 부분 ‘작가의 말’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정철희라는 수사반장의 말에서 나오듯, 경찰들도 국가와 사회의 일개 톱니바퀴같은 부속품일 뿐이므로 형사사법정의 구현이라는 거창한 일을 자기들 손으로 해낼 수 있는 능동적 존재는 되기 힘들고 경거망동이나 불법수사를 저질러서 형사사법작용을 망치는 일을 삼가는 것이 주된 행동방침일 수 밖에 없는 일개 직장인이라는 말을 하려 했던 것 같다. 경찰들이 처한 그러한 현실은, 결국 위대한 존재가 되어보려다 좌절을 겪고 파멸하는 민소림, 김상은이 처한 현실과도 유사하다(그러니 경찰도 살인자도 피해자도 서로를 연민할 수 밖에 없다). 연지혜는 수사반장 정철희의 가르침대로 시종일관 조심스럽게 수사하며 정의를 향한 자신의 불타는 의욕을 감추고 살지만 민소림을 죽인 살인자와의 맞대결에서 기습을 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악귀처럼 치열하게 싸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살인자를 상해했다는 이유로 경찰청 감찰을 받게 될 정도로 조직에 갇힌 힘없는 존재일뿐이다.


결국 이 소설은 현대사회 제도화사회 고도산업사회 분업화사회 매뉴얼사회에서는 개인은 위대해질 기회가 거의 없고 오직 생존투쟁을 하며 가야만 하는 길을 일탈하지 않고 사회의 부속품으로서 살 수 밖에 없다는 비극적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존엄을 박탈한다면 그에 맞서 싸우면서, 냉혹한 경제논리의 시대에 치열한 생존투쟁을 해가면서 애면글면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적응에 실패한 존재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 파멸해가는 존재들을 연민하면서… 장강명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3. 이 소설에서 좋았던 점

범인이 남긴 엽편소설 원고 부분은 좋았다. 원주율의 매력에 푹 빠져 평생 원주율을 쌩노가다식으로 계산해내느라 아무런 생산적 활동도 하지 않고 늙어갔던 한 인도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범인의 삶과 오버랩되면서 범인의 심리와 소설주제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살인자의 고백록 중에서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이라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인터넷 검색 해보니 시인 김수영이 ‘도덕의 원근법’이라는 걸 주장했었다고 하는데, 그것과 장강명의 생각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과 여기서 언급된 다른 소설들을 읽은지 오래 되어서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 내용들을 리마인드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작가가 이런저런 책들에서 인용한 내용이 대부분이긴 하지만(이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해서 장강명 작가가 스스로 발상해낸 사유도 몇 개 있다) 중요한 인문학적 사회과학 자연과학적 화두들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것도 좋았다.


연지혜와 동료형사가 용의자의 DNA를 채취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선 용의자의 수저를 얻기 위해 애쓰는 이 부분은 꽤나 흥미롭다. 경찰들에게서 열심히 취재한 생동감 있는 내용이고 두 형사의 개성이 어떻게 형성된 건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필력이 부족했던 게 아쉬울 뿐.


제시 한이라는 재미교포 영어강사 출신 기업가를 체포해서 신문하는 과정은 나름대로 수사의 리얼리티도 있고 신문과 변명 과정에서 나오는 심리게임이 주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 재미가 그동안의 지겨운 수사놀이가 주는 압도적 지겨움 뒤에 아주 적은 분량으로만 나오니 안타까울뿐.



4. 이 소설에서 나빴던 점

또 다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 소설은 취재내용, 조사결과, 인용 등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생동감이 안 느껴지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살인자의 독자적 사상이라기보다 그동안 열심히 읽은 책들 내용을 읊는 '아는 척'에 지나지 않는 지루한 글들. 게다가 갈마드는 장마다 짤막히 분절되어 있어서 더더욱 체계성이 없어보인다. 또한 이 살인자의 고백록 챕터들 때문에 추리소설적 재미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살인 용의자가 도스토예프스키 독서모임에 참여했던 인물중 하나로 축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수사극의 매력이 확 줄어든다.


연지혜가 경찰이 된 이유와 품고 있는 소명의식을 독자가 충분히 공감하도록 쓰지 못했다. 연지혜가 민소림에 대해 느끼는 연민과 공감 같은 것도 흐릿해서 독자들은 연지혜라는 인물에게 빠져들기가 힘들다. 그리고 민소림과 김상은이 어떤 인물인지 별로 와닿지도 않는다. 작가가 현실에서 만나 이야기 나눈 여러 여성들을 짜깁기해서 억지로 만들어낸 키메라 같은 캐릭터 같다고나 할까.


연지혜는 고졸인가? 대졸인가? 작가가 쓰면서 착오한 건지 연지혜가 고졸이랬다가 대졸이랬다가 한다.


인물들이 인상적인 대사(유머, 위트, 함의를 품고 자신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는)를 말하지 못하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대사를 늘어놓고 있다.


수사과정에서 오는 추리소설적 쾌감이 들어가야할 자리에 각종 공문서 명칭, 경찰 조직명, 경찰행정실무 등이 지겹도록 시시콜콜히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취재형 자료수집형 소설의 한계이고 '기자병'이라고나 할까. 독자는 수사과정에 어느 정도는 흥미를 기울이지만 어디까지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범인을 추리하고 추적하고 또는 실패하는 과정을 지켜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수사실무나 행정적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것들은 언급하더라도 소설의 현실감을 더 해주는 정도로만 가볍게 건드리고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장강명 작가는 범죄 수사 관련 방송에서 권일용씨 등과 함께 방송하면서 수사실무 등에 관심이 커져서 여러 경찰들을 만나가며 열심히 몰입하며 취재했고 그걸 다 써먹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독자들은 아마 이렇게 응답하지 않을까? “그건 적당히 좀 줄여서 쓰세요! 그거 다 읽기 힘들다구요!



5. 결론

두 권짜리 총 800 페이지 분량의 이 소설은 읽기가 매우 지루해서 책을 완독하는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간중간 책을 집어던진 순간이 많았다. 작가는 용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도마뱀 한마리에 이상한 은색 색종이로 만든 비늘을 덕지덕지 붙이고 마분지 잘라만든 날개와 플라스틱 인조발톱을 붙여놓은 것이 돼버렸다. 이 소설은 유능하고 안목있는 편집자가 빨간펜을 들고 분량을 과감하게 쳐내서 300페이지 정도로 줄여놨으면 그나마 봐줄만한 소설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작가가 그간의 작품에서 뼈대만 있고 살이 없는 소설, 취재와 컨셉만 있고 깊이가 없는 소설들을 써왔다는 비판을 들었던 탓인지 분량이 많은 대형소설, 총합소설을 써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내가 지난 3년간 읽었던 소설 중에서 최악이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이 이렇게 된 것은 작가의 거대한 야망과 현실적 역량과의 현격한 격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출간된지 9개월된 아직도 따끈따끈한 이 소설은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판매량이 1권은 소설분야 815위 2권은 464위라고 나온다. 왜 잘 안 팔렸을까? 기자출신이라 미디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미디어의 우호적 서포트도 받은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안 팔렸을까? 내용이 너무 심오하고 어려워서? 무식한 한국 독자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별로 읽은 적이 없어서? 장강명 작가가 이 말 들으면 기분이 매우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순수소설로도 장르소설로도 참담하게 실패해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에 잘 안 팔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