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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대작, 명작 등을 보면 자주 보이는 전형이 하나 있는데, 약간은 기괴한 화자나 주인공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부모와 조부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부모가 어떤 집단에 살았고 어떤 식으로 살다가 어떻게 부모를 낳았고, 부모는 또 그 당시 어떤 집단에서 어떻게 살다가 자신을 낳았느냐를 당시의 근현대사와 엮어서 다양한 주제들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양철북>, <백년의 고독>, <한밤의 아이들> 등이 그 예시이고 아마 <미들섹스>도 그런 부류의 글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 많은 화자가 어떻게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미묘한 문제들이 쌓이고 쌓였는지를 설명하다가 자신에 다다르고, 회상과 현재 사이의 시점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며 약간은 정신 없이 내력을 듣는 셈이다. <미들섹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 기괴한 속성은 양성성이다.



다만 <미들섹스>에서 양성성은 사실 생각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미들섹스”라는 이름 자체가 화자의 가족이 살게 된 새 집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반쯤 농담 식으로 이 주제를 넘기기도 한다. (물론, 이 특이한 집의 개방성과 수평성이 화자가 양성성에 대한 비유로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들섹스라는 지역이 영국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미들섹스>는 좀 더 포괄적인, 서두에서 말했듯 3대에 걸친 그리스 출신 이민자 가족이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고, 적응했으며 어떤 문제들을 맞이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화자는 사실 자신이 그리스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어떠한 혼란도 겪지 않는 편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화자의 양성성에서 비롯된 성장 과정에서의 혼란 및 성적인 모험으로 돌아온다. <미들섹스>는 상당히 혼란스럽게 재밌는 소설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화자의 ‘입담’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나 문헌의 비유를 적절히 섞어가며 자기 마음대로 상상으로 이야기를 진전시켰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더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지만, 그것이 불편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마 디트로이트에서의 생활과 흑인 폭동 등의 사건들은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실제로 겪은 일일 테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화자가 성적으로 고민하며 남자에게 구애를 받고 여자를 사랑하고, 특이한 성적 장애 환자로 취급 받으며 탈출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하다 돌아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매끄럽게 섞인다. 어쨌든 유제니디스는 훌륭한 작가이고, 읽으면서도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미들섹스>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글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명작이 되도록 저술된 소설. BBC에서 21세기 최고의 소설들 중 하나로 선정된 것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비슷한 꼬인 생각을 언제 가졌는가 했을 때 문득 <하얀 이빨>이 떠올랐다. (<하얀 이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혼란스러운 소설이지만, 좀 더 근본적인 공통점을 찾자면 아마도 해학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역시 좀 더 비극적인 뉘앙스가 취향인 듯하다. 비록 <미들섹스>는 마지막 장에서 대놓고 말하듯, 그리스 비극스러운 엔딩보다 미국스럽게 보다 더 긍정적인 결말로 끝을 내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처녀작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