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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몇 십 년 전 정신분석학 책을 읽는 건 약간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은 이미 충분히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그 내용들은 현대에는 이미 전혀 의미가 없다는 반박도 당연할 테다. 다만 정신분석이 우리의 심리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분히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고,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정신분석의 다양한 테제는 알게 모르게 창작물 속의 인물에 상당히 깊게 녹아들어가 있다. 이는 말했듯이 정신분석의 방법이 추론을 통해 어떤 대명제로부터 사소한 신경증 및 성격 등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러한 방식의 추론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기 때문일 테다. (그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식의)
<죽음의 부정> 역시 그러한 책 중 하나인데, 이 책에서 베커는 오토 랑크라고 하는 정신분석학계의 이단아 격 학자의 이론을 들고 온다. 그 역시 우리가 태어나 얼마되지 않던 시절의 경험 및 충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점은 성애와는 다소 무관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인식도 하지 못할 어린 시절에 죽음과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지를 지적한다. 어떻게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유아기와 이성을 가진 아기가 당시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을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갔을지를. 이는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했을 귀결이었으리라.
영아는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에서 자신이 손짓 한 번, 울음 한 번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떻게든 대령되는 것을 보며 자신이 곧 세계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 그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영원성을 당연하게 간직하고 있다. (어째서 굳이 지금 이 순간이 변하리라 생각할까?)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상태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으며 점차 그의 세계에는 불순물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곧 그 자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이느냐에 따라서 이 자아는 상처 입고 변형되며 어떤 방식으로든 굳어진다. 그리고 그는 이 성격을 가지고, 어느새 당연히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한다.
이 억압은 다소 본능적으로 발견되는 행태인데,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다른 모든 이들이 죽을 수 있더라도 자신만큼은 그 예외라도 되는 것처럼 사고를 바라보고, 전장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은 탄환을 맞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움직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예리한 통증과 함께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주체로서 언젠가 죽어야 하는 육체를 가진 동물과 타협하기 위해 진화된 억압 기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정신의 문제가 시작된다. 죽음과 끝에 대한 생각은 정신병으로 인해 깃들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근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의 정신분석적 주제들은 결국 우리에게 그 육체성, 그 필멸성을 상기시켜 주기에 유의미할 뿐이다.
인류가 이를 처리하는 방식은 예전에는 비슷했다. 현대에 와서는 신비주의적으로 느껴질 수많은 종교와 사회적 위치가, '자신'을 이 썩어갈 육체가 아닌 보다 더 추상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오토 랑크가 "영웅주의"라고 표현한 이 경향성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보다 더 큰 것의 일부로 여기도록 인간을 돕는다. 조상을 섬기고 자식에게도 그러기를 요구하는 이들은 자신을 보다 더 거대한 가계의 흐름에서 바라보도록 했다. 원시인들 또한 자신의 죽음을 또 하나의 시작, 어떠한 변화를 향한 도약이라 느꼈으리라는 인류학적 연구들이 많다. 현대의 문제는 이러한 기존의 기획들이 심리학의 손에 파괴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유산들로는 우리가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배길 수 없도록 강요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이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죽음을 수용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의 영웅주의는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 연애 대상의 우상화,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 등은 신을 찾다 못해 결국 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다. (문득 <죽음의 부정>에서 이 부분들을 읽으며 조너선 하이트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정신 건강과 도덕 사이의 관계를 떠올렸다. 진보적인 관점이 어떻게 보다 사람을 더 편협하게 만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것으로 나쁘지 않다. 비록 베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걸 지적했지만, 그것은 그가 키에르케고어를 <죽음의 부정>에서 핵심적인 사상가로 들면서도 우리가 신앙의 도약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정말 딱히 그럴 수 없다.
서두에서 밝힌 것과는 달리, <죽음의 부정>은 2023년 지금에 와서도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다루는 내용은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지금 읽듯이, 나중에도 반추해볼만한 무언가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가 주장하는 것이 현대에 더욱 유효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체계화된 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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