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생전 책 안읽는 놈이었음

인생 대충 살아서 대학도 못가고

인생 답 안 보여서 병장쯤에 전문하사로 군대 말뚝 박으려다

걍 전역함.

사회 나와보니 여전히 답 안 보임.

야간 편돌이에 낮엔 피시방서 롤만 줄창 하며 한 2년 살았는데

부모님이 뭐 폴리텍이라도 들어가서 기술 배우라고 함

난 싫다고 했지.

그랬더니 집에서 꺼지래.

ㅇㅋ하고 숙식 노가다 하러 감.

숙노 하는데 나름 적성에 맞더라.

아침에 일어나는 게 좀 빡새긴 한데 적응되니까 그럭저럭 할만함.

내가 있는 팀은(지금도 숙노쟁이임) 잔업 거의 없어서

한달 공수 좆도 안 나오는 포설 팀인데

난 오히려 좋았음. 딱히 목돈 만들어 나가겠다 포부 가지고 들어온 건 아니라서.

일 마치면 피시방 가고

주말에 피시방 가고

일하고 피시방 가고

롤하고 롤하고

롤은 존나 하는데 티어는 골드 고정이고

뭐 롤이랑 포설만 땡기면서 1년 반쯤 노가다 했음.

돈 쓸데라곤 피시방비밖에 없으니 돈은 잘 모여서

27살인데 지금까지 한 4천 모음.

그러다 올초였을 거임.

여느 때처럼 피시방 가서 롤하고 있는데

연패해서 개빡쳤음.

아 씨발 좆같네 하고 흡연실에서 담배피면서 싱글벙글 지구촌이나 보고 있는데 문득

갑자기 그냥 막연히

왜 이러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슬슬 자기개발 같은 걸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은 드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자격증 공부?

아니면 지금이라도 대학 입시 준비?

공무원 준비?

걍 다 하기 싫고 엄두도 안 남.

그러다 떠오른 게 만만한 독서였음.

그래도 책을 읽으면 적어도 시간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그러고 다음날 서점가서 사온 책이 데미안이었는데

시발 읽어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존나 난해하기만 하고.

기억나는 건 데미안 엄마가 존나 쎅끈했다?

싱클레어랑 데미안 엄마랑 떡칠 줄 알았는데

떡치는 장면 안 나와서 좀 아쉽더라

암튼 그렇게 데미안 한 권 읽고나니까

솔직히 재밌는지도 모르겠고 뭔가 시간을 덜낭비한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피시방 가서 롤하는 것보단 낫겠거니 하며

그 뒤로도 책 사서 읽음.

책 사다 보니 노가다 숙소에 두기도 마뜩찮아서

이북으로 봄.

주로 소설만 보다가

비문학도 읽다가

과학 서적도 보고

뭐 그냥 요샌 이북 월간 랭킹 이런 거 올라온거 아무거나 읽음


사실 책을 읽으면 내 인생이 좀 긍정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는데

그런 건 없더라

예전엔 노가다하며 피시방을 갔다면

요샌 노가다하며 책을 볼 뿐

인생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음.

그리고 방구석에서 책 읽는다고 뭔가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음

오히려 독서는 드라마틱한 것을 거부하는 행위 같음

방구석에서 책 읽는데 무른 색다른 일이 일어나겠어

다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적어도 시간을 버리고 있지는 않다는 작은 위안?

근데 또 모르지. 나 같은 놈이 책 읽어 봐야

피시방 가서 롤하는 것이나 진배없을지도.


무튼, 막연히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넋두리가 하고 싶어졌음.

그리고 묻고파졌어.

너넨 책을 왜 읽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