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0. 서론
“사실 삶이라기보다는 값이나 돈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오. 내 삶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값이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언급한 내용이다. 그 책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신을 모독하고 자신의 삶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글을 쓰는 광기의 천재로 나온다. 적어도, 쿳시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잉크로 모든 것을 짜내어 돌판에 새기는 글쓰기. 모든 걸 걸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창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무엇일까? 글쓰기의 본질은 간단하다. 표현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정교한 의사소통체계를 결코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글쓰기에 한계가 드러난다. 글쓰기는, 그 철저한 방식에도 불구하고,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독자는 저자가 아니기에, 그러기에 모든 저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글쓰기가 오해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결코 이해받지 못할 것도 안다. 그래도 그들은 쓴다. 왜냐? 이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신비와 경이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써야 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될 수 없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본래는 신비였다. 우리가 불을 보며 느끼는 경이, 결코 텍스트로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불꽃들. 그러나 신화는 사라졌다. 불꽃을 읽을 수 있는 사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제단으로 가는 길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위대한 옛 지혜와 무한한 신비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남은 건 글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무한한 것, 그것이 불꽃이고 신비이다. 반대로 말로 표현 가능한 것, 설명할 수 있는 것, 유한하고 끝이 있는 것, 그것이 말이고 글이다. 글이 세상을 지배할 수록 신비는 그 힘을 잃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글의 최고 목표는 신비의 무한성과 불가해성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불이 사라진 곳에 글은 존재하나, 글은 불을 되살리려 한다. 신비가 조금씩 사라진 그 자리에 우리는 수많은 글들을 본다. 글쓰기의 목표는 신비의 무한함을 재현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과 글은 뫼비우스의 띠 처럼 앞과 뒤가 이어진 채 얽혀 있다. 아감벤은 10까지 에세이들을 통해 글, 말, 언어, 신비의 여러 측면을 탐색한다. 아감벤에게 언어는 감옥이자 형벌이다. 그와 동시에 문학은 곧 잃어버린 신비에 대한 회상이다. 글쓰기란 존재를 잉태하는 동시에, 그 존재에 대한 저항이다.
1. 신비를 잃어버린 글쓰기
앞서 말했듯이, 글쓰기는 신비를 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와 기술혁명 앞에서, 더 이상 신비는 작동하지 않는다.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 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오만한 글들만이, 명징한 글쓰기가 신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세계를 뒤덮고 있다. 마치 자연수와 싸우려 하는 푸네스처럼, 무한한 신비를 텍스트로 채워버리려는 글쓰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불을 대체한 글쓰기가 가져온 것은 구원 없는 신비이다. 근대 사회의 관료주의는 새로운 신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근대 사회의 철저하게 짜여진 그물망 아래서, 실존이 짓밟히고 있다. 더 이상 톨스토이와 플로베르의 풍부한 인간 실존의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서사는 카프카의 서사. 선고되지 않는 재판과 들어갈 수 없는 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하는 것은 나의 허락 없이 존재한다" 라고 말하는 홀든 판사처럼, 언어는 무한한 세계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서 세계 전체를 자신의 허락 안에 속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신비를 잃어버린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돌아가기를 명령하고, 세계 전체를 자기의 언어에 속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신비의 정체를 알아버린 뒤, 마침내 언어는 선언한다. 모든 것이 내 허락 하에 존재하고 있다고.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언어의 감옥 아래 우리는 완전히 갇혀버렸다.
2, 신비는 사라졌는가.
그렇다면 신비를 담는 글은 이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 저항은 무의미한가? 아니다. 아감벤은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비록 과학과 철학 그 어디서도 더 이상 신비를 언급하진 않지만, 문학은 다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불을 노래할 수 있다. 아감벤은 문학에서 희망을 본다. 비록 불은 꺼졌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사제는 다 사라졌으며, 지도도 없어졌고, 글조차 불을 잊어버렸지만, 단 하나, 문학만은 신비를 옮길 수 있다. 비록 더 이상 불 그 자체를 기억할 순 없으나. 불의 부재, 망각, 이 모든 것들은 문학이 써내려 갈 수 있다. 문학은, 모두가 잊어버린 불의 마지막 전달자이다.
3.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러하면 이토록 신비를 되살려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디지털 혁명과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 우리는 불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 누구도 더 이상 무한한 세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모두가 잊어버린 불을 다시 되살려야 한다. 비록 언어의 물질적 한계, 시간적 한계로 인해 우리는 불의 편린밖에 볼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읽어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불이 아니라 불을 재현한 조잡한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그 조잡한 이미지를 지도 삼아 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 그 누구도 모르고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바로 이곳.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4. 결론
다시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의 도스토옙스키에게 돌아가보자. 그는 자신의 글을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써내려 간다. 그렇다면 그 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양아들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칠흑같은 어둠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그는 난간을 잡고 깎아지른 어둠 속의 저기를 내려다본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 영원한 시간이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시간이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 파벨이 살아 있었다. 전보다 더 생기 있게 살아 있었다. 우리는 추락하는 동안 가장 강렬하게 살아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결코 존재하지 않는 그의 양아들.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이 무한한 것들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죽는다"라는 신의 섭리를 부정하며, 무한한 것들을 다시 재현하려는 것. 다시 말해, 그는 글쓰기를 통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그 자체로 신성 모독이다.
이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다. 글쓰기는 자기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의 온 힘을 다해 신비의 티끌이라도 재현하고자 하는 기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은밀한 반역이 드러난다. 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 섭리를 거스르고 영원해지고자 하는 것. 그래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신을 이해하려는 것. 글쓰기는, 그 자체가 신의 대한 순종인 동시에, 신에 대한 반역이다.
---
전에 한번 독갤에 개인 정보가 들킨 적이 있어서 불안해져서 감상문 싹 다 내렸는데, 이 감상문 찾는 사람이 있어서 재업함.
ㄱㅅㄱㅅ! - dc App
뭘 했길래 개인 정보를 들킴
글 ㅈㄴ잘쓴당
이 책을 읽으면 3번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신비에는 무슨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노
글 너무조타 - dc App
멋지다
글 ㅈㄴ 잘 쓰네 확 읽힌다 눈이 아주 빠르게 돌아감
오 또 다른것도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