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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무독(無讀)의 시대다. 여기저기서 독서가 중요하다고 공염불 외는 소리는 들려오는데, 정작 그 이유까지 명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독서 무용론을 들고 오는 이들의 논리는 일견 허술한 듯하나 의외로 파훼하기 힘든 면모가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신은그리 대단치도 않은 독서라는 행위를 굳이 취미의 만신전에 올려야 할 당위성은 없다. 책을 읽는 나에 취해 선민의식을 느끼는 이가 아니라면 독서의 이유 역시 게임 혹은 여타 취미와 같이 단순한 재미에서 찾으면 그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입을 닫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교양인의 왕국에서 자행한 대관식을 거쳐 축성을 통해 야만인들과의 교류를 차단한다면 귀를 더럽히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답변과 태도는 스스로를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그러한 자족감을 제하면 무용론자들의 폐부를 찔렀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독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보일 태도로는 추하다는 평을 해도 과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첫째로, 독서는 지적인 체급을 길러 주는데 있어서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 준다. 러셀은 그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지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 혹은 폭넓고 인간적인 인생관을 세우는 수단보다는 단순히 전문적 기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무용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아마도 숙고하는 습관을 조성해 준다는 것이다.“ 동일한 스포츠 종목을 같은 시간 동안 배운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운동과 기초체력의 꾸준한 단련을 통해 운동신경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던 이와 의학적 기준에서 비만인 상태로 배우고자 하는 스포츠 종목을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한 이의 습득 능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독서는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우리의 사고력과 집중력을 길러주고 이는 다른 현대사회의 취미들이 선사하기 힘든 강력한 이점이다.


두 번째로, 독서는 위와 같은 직접적 실용성을 넘어서 간접적 실용성의 측면에서도 특장점을 지닌다. 위와 동일한 저서에서 러셀은좁은 의미의 실용적 교육은 인간의 기능뿐 아니라 인간의 목적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독서의 지평을 조금 더 거시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이는 독서 전반에 대한 무용론보다 더 높은 지지를 받는 문학 무용론자들에 대해 가장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반기를 드는 논거가 된다. ‘공부는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과정이라는 클리셰와 같은 표현의 관점에 있어서, 독서만큼 그 기능을 잘 수행해낼 수 있는 행위는 찾기 요원하다. 인간 종 전체로서의 총체적인 삶에 대한 분석이 아닌 개별주체로서의 삶에 대해선 누구도 답해줄 수 없고, 그와 관련된 어떤 직접적인 학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학 역시 인생이라는 긴 산책 동안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어줄 순 있어도, 결국 보조의 수단에 그칠 뿐 타인의 이론에 내 모든 삶을 맡길 만큼 믿음직한 대상이 되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개별 주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인 삶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답변들에 대해 세계는 영원히 침묵한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의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문학가이다. 비이성적 측면은 우리를 분리하고, 이성적 측면은 우리를 통합한다. 작가는 끊임없는 분리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넘어서기 위해 투쟁한다. 그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삶의 원형에 대해 탐구해 나간 결과물이자 정수로서 내놓는 것이 바로 책이다. 그러한 작품의 감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상에 대한 감식안을 기르고 해상도를 높여가며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해상도 구현의 불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높은 해상도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물 모니터를 통해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160p 영상으로도 아바타를 볼 순 있겠지만, 영화관에서 3d로 아바타를 감상하고 온 이와 비교하면 그 감상의 폭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단순한 3시간짜리 오락을 위한 영화에서도 그러한데, 아바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양태의 영사에 있어 해상도를 높여주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것인가. 그러한 해상도의 퀀텀점프를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서의 책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무용론에 대한 온전한 타파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