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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일리아스 읽었을 때 살짝 정리한 건데, 요즘 삼국지 재밌어서 삼국지에 빠져 살아서 다시 정리해서 글 써봄. 둘 다 뛰어난 군상극이면서, 정말 비슷하면서도 또 엄청 달라서 같이 볼 때 흥미로운 면이 많아서 나름대로 정리해봄. 이건 개인적인 감상이고, 일리아스나 삼국지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 같은 건 본 적이 없는 순수한 라이트 독자의 인상비평에 가까우니 "님 잘못 읽음!" 이라고 주장한다면 보통 그 사람이 맞을거임. 그리고 일리아스가 삼국지에 비해 분량이 적기도 하고 내가 일리아스보다 삼국지를 더 많이 읽어서 삼국지가 예시가 좀 더 풍부한 면이 있는듯


1. 스케일의 차이


삼국지 볼 때마다 한 천명 정도 죽었다 하면 소규모 전투고, 만 단위 쯤 되어야 왠지 싸우는 거 같음. 반면 일리아스는 이게 군대 이끌고 전쟁을 하는 건지, 패싸움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개인의 무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임. 그래서 약간 왕좌의 게임이나 삼국지보단 느와르 영화를 보는 느낌? 


2. 캐릭터들의 마인드 차이


삼국지는 이상하게 사기를 치면 당한 놈이 잘못이라는 마인드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음. 아니 그걸 넘어서 사기 친 놈이 오히려 칭찬받음ㅋㅋㅋㅋㅋ 반면 일리아스는 그나마 머리 좀 굴린다는 오딧세우스는 맨날 교활하다고 꼽먹음. 

또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충성이라면, 일리아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명예인 거 같음. 앞의 내용과 이어지는 것도 맞는데, 명예를 중시하다보니 거짓말이 부도덕하다는 인식이 강해서 사기를 좀 덜 치는 느낌. 그리고 말로는 한 왕실의 부흥이라며 다들 이빨 털지만 사실 다들 계산기 한번씩 두드려보고 이득일때만 은근슬쩍 참여하는 씹새끼들이 가득한 삼국지에 비해, 일리아스의 무장들은 좀 순수한 면이 있음. 당장 싸움도 치정싸움 때문에 일어난 거고, 여자 뺐어서 삐져서 돌아가고(삼국지였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바로 야습해서 아가멤논 목 딸려 했음) 친구의 죽음 때문에 죽을 걸 알면서도 전쟁을 하는 낭만적인 면이 강한듯.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삼국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인내인데(육손이나 사마의가 대표적으로 인내로 승리를 얻어낸 케이스고, 유비나 조조 다 너무 성급하게 싸우다 파멸하는 걸로 나옴) 일리아스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겸손인듯(신의 말을 듣고 꼬리를 만 디오메데스는 살아남았지만 깝치던 헥토르는 죽었음).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


3. 죽음에 대한 가치관


삼국지는 솔직히 말해서 갑자기 사람이 픽픽 죽음. 화웅이 갑자기 관우한테 죽는다거나 장비가 갑자기 배신당해 죽고, 노숙이나 곽가 이런 애들도 갑자기 죽음ㅇㅇ 게다가 그러한 죽음을 마치 인생무상처럼 뭐 어쩌겠어 하고 넘기는 염세적인 느낌이 강함. 반면 일리아스는 조금 더 사람의 죽음에 애도하는 느낌이 강함. 누가 죽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줄줄이 읊는 것도 그렇고. 물론 호메로스의 필력 때문도 있지만, 삼국지에 비해 일리아스의 캐릭터들이 죽음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대하는 느낌? 


4. 전쟁 방식 차이


삼국지는 후한이 배경이다 보니 기병의 중요성이 올라가고, 기동력 위주의 싸움이 가능하다보니 다양한 방식의 전략이 나오는 거에 비해서, 일리아스는 아직까지 전차귀족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보니 다들 전차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격 방식 역시 창 위주다 보니 다들 창을 잘 쓴다는 얘기가 많음. 그리고 삼국시대의 무구는 주로 말이나 무기에 묘사가 집중된다면, 일리아스의 무구는 무기도 무기지만 투구나 정강이받이같은 갑옷 역시도 많이 묘사가 되는듯. 확실히 삼국지에 비해 일리아스가 고대 사회의 느낌이 강함. 또한 공성전, 해전, 소모전, 기동전 등 다양한 방식의 전투 방식이 나오는 삼국지와는 달리 조금 평이한 면이 있음.


5. 캐릭터를 띄워주는 방식의 차이


일리아스에서는 대놓고 자기 잘났다라는 멘트를 많이 침. 제우스가 너희들 다 나한테 개겨도 안됨. 깝ㄴㄴ 라고 한다거나, 아킬레우스가 대놓고 너희들 나 없으면 못 이기잖아? 라며 티배깅하는 것도 그렇고. 반면 삼국지에서는 누가 봐도 쫄아야 하는데 안 쫀다 라는 걸로 인물의 대범함을 많이 표현하는 듯. 예를 들어 조조가 적벽에서 개털리면서도 "제갈량 좆밥이네 나였으면 여기 매복 심어놓음"이라며 씨부린다거나, 관우가 팔 수술해야 한다고 하는데 마취 필요없다면서 바둑을 둔다거나 같은 대놓고 자기 잘났다라는 것보다는 나 안쫀다며 가오잡는 모습을 많이 보여줌,


6. 전쟁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


일리아스에서는 전쟁 자체를 매우 끔찍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줌. 당장 헬레네도 참혹한 전쟁 때문에 멘탈이 많이 깨져있는 모습이 자주 나오고, 장수들도 몇 번이고 싸움을 조기 종결하려 하지만 제우스 씹년 때메 자꾸 방해받는 모습이 많이 나옴. 또한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놈이라는 묘사도 극히 드뭄. 분명 그리스 위주의 서술이긴 하나, 트로이 총사령관 헥토르는 누가 봐도 멋진 데 반해, 아킬레우스나 아가멤논 같은 놈은 좀 찌질한 면이 강함. 또한 싸움에 대한 묘사도 딱히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라는 것보다는 그냥 둘 다 신들의 장난질에 희생당한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표현하는 등 전쟁 자체에 대한 비극적 면모가 강함.

반면 삼국지에서는 전쟁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오히려 적음. 그렇다고 전쟁을 멋있게 표현하는 것도 아닌데, 일리아스는 전쟁이 문제라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삼국지는 전쟁을 만든 이 난세가 문제고, 난세라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한다는 느낌이 강함. 앞에 있는 사기당한 놈이 잘못! 이라는 마인드랑도 연결이 되는데, 약육강식의 냉혹한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고, 도덕적이거나 쎈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쎄고 도덕적인 놈이라는 논리가 판치다보니 도덕성보다는 일단 살고 보자! 라는 마인드가 강함. 힘 없는 유장이나 헌제는 도덕성과 별개로 힘 있는 자들에게 짓밟히고, 동맹 뒤통수 맛깔나게 때린 새끼인 손권 참교육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등, 권선징악과 유교적 질서는 붕괴되고, 오로지 힘만이 지배하는 지옥같은 세상이 문제인 거다 라는 느낌이 강함. 그리고 이건 조금 더 나아가, 이런 사회이기 때문에 도덕성은 조금 내려놔야 한다라는 느낌까지 드는데, 대놓고 유장 땅 삥뜯거나, 제갈량이 등갑군 싹 다 불태워버리는 장면을 보면 분명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미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걸 알 수 있음 (유장은 삼국지에서 백성 걱정 하는 몇 안되는 인물로 나오고, 등갑군이 불탈 땐 제갈량이 죄책감을 느낌) 유비나 제갈량처럼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람들 조차 난세에는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는 비정함이 느껴지는 대목임.


7. 운명과 신에 대한 차이


일리아스에서는 신이 최고 씹새끼들임. 어떻게 보면 지들 권력투쟁을 위해서 인간들을 장기말처럼 이용하는 면이 강함. 특히 제우스 이 씹새끼가 제일 쓰레기인데, 어느 날은 트로이 도와줬다가 어느 날은 아테네 시켜서 그리스 도와주다가 하여튼 지 꼴리는 데로 살고, 인간은 그냥 제우스의 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실험실 쥐새끼 취급임.

반면 삼국지에서는 신이 인격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어찌 보면 일리아스보다 더 잔인한 모습을 보여줌. 사마의 호로곡에서 태워 죽일려다가 비오는 것도 그렇고, 제갈량이 목숨 연장술 할려다 실패하는 것도 그렇고 억까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정함. 그렇다고 다른 진영에게 따뜻하냐? 오나라의 주유는 아주 그냥 정신병 걸릴 정도로 괴롭히고 위나라는 적벽 말아먹고, 한중도 말아먹음. 결국 천명은 위도 오도 촉도 아닌 사마의의 진을 선택했고, 조조, 유비, 제갈량, 주유 등 영웅들이 목숨 바쳐 만들어낸 업적들은 그저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벼렸음.

정리하자면 일리아스의 신은 난폭하고 폭력적이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재앙이라면, 삼국지에서의 천명은 누구에게나 차가울 정도로 비정하고 냉혹한 칼바람 같은 재앙처럼 느껴짐.


요약


- 삼국지는 스케일이 큰 전쟁물이라면, 일리아스는 느와르 느낌이다

- 삼국지는 당한 놈이 잘못! 이라는 마인드가 기본에 다들 위선자 느낌이 강하다면, 일리아스는 명예를 소중히 하고 낭만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 삼국지는 주인공이 죽어도 그럴 수 있지! 라고 넘어간다면, 일리아스는 죽음 하나하나에 멘트를 쳐준다

- 삼국지는 기병 위주 전투에 무기와 말 위주 묘사라면, 일리아스는 마차 위주 전투에 갑옷 위주 묘사가 많다

- 삼국지는 배포와 대담함으로 상남자다움을 포현한다면, 일리아스는 개인의 강함과 용맹으로 상남자다움을 표현한다

- 삼국지는 전쟁의 원인인 난세를 끔찍하게 표현한다면, 일리아스는 전쟁 자체를 끔찍하게 다룬다.

- 삼국지는 운명을 냉혹하고 비정한 얼음 같이 표현한다면, 일리아스는 신을 폭력적이고 난폭한 불같이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