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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광장/구운몽>, 최인훈, 문학과 지성사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의 기쁨도 잠시, 우리 역사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는 전쟁의 폭풍 속에서 휘몰아쳤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과 기존의 가치들을 앗아갔고, 한국 문단계도 그 전쟁의 폭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비록 발발 3년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일단락 되었지만 가족과 형제들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총칼을 맞아 숨졌던 끔찍한 사건의 후유증은 여전히 저리듯이 지속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절단되었으며, 불구가 된 남북은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져 나갔다. 이 찢긴 고기 조각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수들은 각 지역에 정부를 세우고, 이를 밀어 붙여 독재 정권을 옹립했다. 자유의 만세를 외치던 민중들은 옆집에서 쏟아진 총알과 포탄에 입이 찢기고, 손발이 잘려 나간 채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우리의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을 앞세워 울부짖던 야수들에 의해 사위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혁명을 통해 우리 민중들은 부패와 독재에 맞서 싸웠고 철로 만들어져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독재 정권의 동상을 철폐시키는 과업을 이뤄냈다. 짓궂은 역사와 세상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이 자유는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야수를 맞이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혁명의 성과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변모는 1950년대의 순수문학적 경향에 대한 반성과 함께 대두한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야기된 창작계의 변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변모는 한마디로 문학인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변화라 풀이된다. 즉 6.25의 상흔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적 거리를 갖게 되고 또한 자유당 정권의 부패에 따른 저항의식 등이 휴머니즘을 기저로 하여 싹터 나오는 등 그동안 순수문학이 견지해온 문학의 독자성,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좌우 대립으로 경색되고 상실되었던 사회적 공리성이 되살아나는 형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지적해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반적인 특징이 모든 작가에게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각기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특징 중 특정 측면들이 부분적으로 강조되면서 1960년대 전체를 조망할 때 여러 특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950년대의 문학과 불가분 관계를 갖고 계승, 발전해왔다는 사실도 있으나, 1960년대 문학은 1950년대 문학과 질적으로 구별되고, 그러한 비교는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이라는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가 비교적 잠잠해지면서 그에 대한 문학인들의 고민과 대응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과 관련 있다 할 것이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이었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4.19혁명으로 탈바꿈한 사회가 변화의 몸살을 앓던 시기에 1960년 11월에 <<새벽>>에 발표된 『광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1948년 이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소재를 정면에서 다룬 점에서 주목 받는데, 분단과 전쟁과 후진국이라는 비참한 역사 앞에 선 한 지식인의 오뇌가 깊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남북이 분단되고 그 분단된 곳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그들만의 정치 이데올로기도 작용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자유롭고 북한은 자유롭지 못하다. 공산주의는 빨갱이다.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다.’ 식의 이데올로기였다. 그의 역도 북쪽에서 성립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힘으로 인해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민중은 이 이데올로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가 왜 중요한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강요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민중은 숨 쉴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태는 『광장』 속에서 광장과 밀실의 비유로 나타난다. 남한은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곳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장을 빼앗긴 것이다. 그리하여 남한은 자꾸만 밀실 속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밀실은 답답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그런 걸 가지고 산뜻한 지붕, 슈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구두 끝을 비비는 마루며, 덴마크가 무색한 목장을 가지자는 말인가요?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갱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 가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허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길 가던 착한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그에 반면 북한은 광장만 있고 밀실은 없는 곳이다. 밀실을 벗어나 광장으로 왔는데 이곳에는 혼자서 숨 쉴 곳이 없다. 숨도 같이 쉬어야만 한다. 이 광장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답답한 것이 아니라 거의 질식할 수준이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문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 저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 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 편집장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혼자서 공화국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이 명령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곧 공화국을 위한 거요.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버리시오.’ 라구요.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 그렇습니다. 인민이란 그들에겐 양 떼들입니다. 그들은 인민의 그러한 부분만을 써먹습니다. 인민을 타락시킨 것은 그들입니다. 그리고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른 개들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하…….”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4.19 열풍 후 젊은 층에 대두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표면화시킨 것으로 작품에 짙게 배어 관념성마저도 탈출구를 분명하게 발견하지 못한 시대의식의 반영이었다. 주인공인 이명준은 객관적 현실 상황을 중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관념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인물이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조성된 민족 비극의 산물이었기에 그것은 고스란히 현실 자체의 문제로 되돌아왔다. 그런 점에서 관념적 세계, 산뜻한 감성의 세계, 세련된 언어 구사 등을 중시하여 내성적 기교주의라도 볼 수 있지만, 문제 자체의 충격파가 갖는 시대적 의미를 중시하면 사실주의적 작품으로 규정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작품은 모더니즘 의 성격도 갖고 있다. 어쨌든 최인훈의 『광장』이 갖는 이러한 다양한 측면은 1960년대 소설의 주요한 면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 진정한 정치적 자유와 사랑이 가능한 광장을 찾고자 하는 이명준은 바다에 빠져 자살을 한다. 이를 두고 현실에 대한 도피적인 태도나, 객관적인 사실을 외면한 채 개인의 관념에 몰두한 결과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고 한 소설의 말머리 부분에서 이는 도피적 태도나, 관념의 몰두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명준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 하는 것은 그것들을 역설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광장』의 결말은 그 시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지성의 발흥은 독재 정권과 부정에 항거한 4.19 혁명의 정신적 반영이었다. 그 뒤 곧바로 5.16 군사 정변이 터지기는 했지만 1960년대 작가 정신에는 의연히 4.19 정신이 한 뿌리로 자리 하고 있었다. 이러한 힘은 과거의 작가에게는 문학적 변모의 한 변수로, 그리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첫 출발의 계기기로 자리 잡힌다. 이를테면 김정한, 이호철, 전광용, 하근찬 등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후자의 경우는 정을병, 유현종, 이문구, 방영웅, 신상웅, 남정현 등을 들 수 있다.
당시의 문학사적인 측면과 아울러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아도 여전히 남북의 이데올로기, 절단과 절연의 이데올로기는 눈의 섬광이 뚜렷하다. 심지어 이젠 갈라지고 불구가 된 것은 남북만이 아니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갈라지고 찢어져서 서로를 할퀴어 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인훈의 『광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남북 분단과 전쟁, 후진국 속 지식인의 고뇌일 뿐만이 아니다. 『광장』의 의미는 이명준이 드넓은 바다에서 갈매기를 보고 떠올리고야 마는, 절연과 혼란 속에서도 포기 할 수 없고, 포기 해서도 안되는 인간 본연에 대한 무언가 됨이 바람직 하다.
참고자료
<한국현대문학사>, 김우종 김윤식 외, (주)현대문학
<광장/구운몽>, 최인훈, (주)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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