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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나팔>은 판타지 소설이다. 이건 확실할 테다. 그것도 꽤나 재밌는. 사실,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총서 중 이런 책을 만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일찍이 알프레드 자리의 <파타피지크 학자 포스트롤 박사의 행적과 사상: 신과학소설>을 읽었을 때도 약간은 비슷한 인상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확실히 판타지 소설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판타지나 기담에서 기대되는 재미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귀나팔>은 그렇지 않다. 기괴하기 짝이 없고 당혹스러운 설정과 세계를 바탕으로 노인들을 주인공 삼아 꾸려나가는 이야기는, 참 신기하게도 오히려 돌고 돌아 현대에 '다시 쓴' 전설 따위가 아니라 현대에 쓰는 전설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의 "귀나팔"은 사실 그리 핵심적인 소재는 아니다. 그저 아흔세 할머니인 주인공이 남의 말을 잘 듣게-구체적으로는, 저 멀리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도와주는 일종의 신비한 보청기일 뿐이다. 그 엿듣는 목소리가 딱히 <귀나팔>의 이야기 진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지는 않으며, <귀나팔>의 삽화 속에서 늘 귀나팔을 들고 있는 이 노인은 괴상한 양로원에서 고약한 모험을 진행하며 수수께끼를 풀고, 어느새 뒤집혀버린 세상 속에서 어쨌든 자신의 소원을 이룬다. 기실, 그 소원의 내용과 마지막 문장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늙은 여자가 라플란드에 갈 수 없다면, 라플란드가 늙은 여자에게 와야 한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귀나팔>은 다시 한번 '나'에 대한 소설이다. 주인공이 바라보던 세상에 대한 망상이 실제 세상과 뒤섞이고 어느새 이야기 속의 인물이 현실 속으로 뛰쳐나오며 세상을 이야기로 잡아먹어버리는 그런 소설. 그 이야기는 처음부터 무언가 신비스럽고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이었고, 되란대로 된다는 듯 기괴한 옛 전설이 현대에 다시 이뤄지다가 최후의 비밀이 숨겨진 탑의 지하에서 자기 자신을 만난 주인공은 스스로를 먹고 부활해 (아누베스의 자식들이 다음 인류가 될 것이라는 마지막 묘사를 볼 때, 아마 불사조-베누 모티브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마녀가 된다. 이런 압도적인 유아주의를 좋아하는 편이다.
역시 모더니즘이 유아적인 편이라 좋음
설명만 봤는데 확실히 제안들중에 이질적인 작품이긴 한 것 같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