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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를 읽고 언젠가 반드시 감상을 남기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던 적이 있다. 다른 읽어야할 책들이 많았기에 계속해서 미뤄왔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많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속에선 잊었던 금각의 형상이 점차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금각사는 왜 이토록 나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을까? 금각이 불타는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금각의 의미와 금각을 불태워야만 하는 이유를 살피기 위해 <금각사>의 주인공 미조구치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부터 살펴봐야 한다.
소년기
세계와의 원활한 삶을 위해선 한 존재의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적절한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미조구치는 선천적인 말더듬 증상 때문에 내외부 세계 간의 의사소통에 딜레이를 겪기에 타자와 적절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고 원활한 삶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으로 남아 있으며 이 열등감은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열등감으로 말미암은 미조구치의 세계는 결국 타의적으로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로 창조된다.
미조구치의 소년 시절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배신의 기억들로 점철되어있다. 그리고 이 배신의 기억들에 내재된 서로 반대되는 관념들의 대조를 통해 주제들을 암시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신행위는 3가지인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배신은 우이코의 배신이다. 우이코란 인물은 미조구치가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우이코는 미조구치의 내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즉, 미조구치만의 개성이라 볼 수 있는 말더듬 증상이란 수치를 드러내는 증인이자, 경멸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우이코는 아름다움 덕택에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원활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탈영병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세계와의 관계를 거부한다. 세계를 배신하는 우이코의 배신에서 미조구치의 우이코에 대한 아름다음은 고조된다. 그것은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느끼고 동류의식을 갖게 하며,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으로서 ‘나’를 보고 나의 수치를 뒤집고 헤집는 타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멀게 느껴졌던 외부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동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이코는 미조구치의 이런 인식을 재차 배신하여 ‘나’의 세계에서 다시 빠져나가 탈영병의 여자로 전락하고,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또 다시 미조구치를 경멸하듯 홀연히 떠나간다. 그리고 미조구치는 또 다시 세계의 인식에 딜레이를 겪음으로써 그 자리에서 잠에 빠져든다. 혼자 남겨진 미조구치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무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미조구치가 우이코에게 경멸을 받는 것과는 반대로 우이코는 미조구치가 처음으로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인데 이 점에서 우이코란 인물은 미조구치의 고유한 미적 관념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형성 과정을 위한 등장인물이다.
다른 아름다운 여자들은 단지 우이코의 재현에 지나지 않으며, 우이코는 인물의 아름다움 특히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외부의 대상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임으로써 아름다움을 달성하고 싶은 미조구치에게 결코 그것을 이룰 수 없는 열등감을 인식하게 하는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배신은 금각의 배신이다. 미조구치는 아버지로부터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사실상 세뇌당하며 자랐다.
하지만, 금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조구치에게 ‘미라는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적당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적 기준이나 누군가로부터 배운 미적 기준이 아니라, ‘오로지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병환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미조구치에게 자신의 미의 결정체인 금각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의 오랜 벗인 금각사의 주지에게 미조구치를 의탁할 겸 미조구치와 금각을 보러간다.
하지만 미조구치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금각에선 ‘아무런 감동이 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가꿔온 금각에 대한 스스로의 상상과 그를 토대로 형성된 미적 관념에 몽상을 거듭한 끝에 금각은 ‘훨씬 더 아름다운 금각’으로 왜곡된다. 이 금각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금각이고, 이것은 미조구치에게 있어 금각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표상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또한, 금각은 아버지의 죽음과 대조되는 이미지를 가진다. 금각으로 가는 길은 도처에 죽음의 이미지가 도사리고 있어 사실상 미조구치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죽음을 암시하고, 존재의 일시성과 대비되어 몇 백년을 그 자리에서 견뎌온 영원성의 상징인 금각과 대비되어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의 소멸이라는 과정을 미조구치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금각은 앞으로도 미조구치의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미에 있어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 금각에 대한 집념은 ‘자신의 추함이 근원’이 된다. 금각은 ‘나’와는 대비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즉 ‘나’를 비롯한 존재들의 유한성과 영원불멸의 존재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각은 미조구치의 존재의 유한성과 불안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괴롭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배신은 어머니의 배신이다. 어머니의 사촌이 사업실패로 머물 거처가 없자 미조구치 가족이 기거하는 절에 들어와 잠시 의탁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그 사촌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범상치 않은 들썩거림에 미조구치가 눈을 뜨자 이미 일어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미조구치의 눈을 덮는데,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 수용한 미조구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눈을 감아 추한 광경을 보지 않는다.
그 이후 어머니는 미조구치에게 추한 것으로 남는데, 단순히 어머니의 추함을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금각의 아름다움과 어머니의 추함을 제시하는 아버지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제시하고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미조구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과정을 드러낸다.
아버지가 죽고난 뒤 어머니는 미조구치를 금각이 있는 녹원사에 의탁하며 주지가 될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추한 존재인 어머니의 바람은 진심으로 이뤄야만 하는 목표로 작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를 옥죄는 것으로, 따라서 반작용으로 주지가 되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희망한다. 따라서, 녹원사의 후사를 정하는 주지마저도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금각을 관람하러 온 창녀의 배를 밟고 누구에게도 반성이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실토를 하지 않는 비행의 근원에는 추한 어머니가 있으며, 금각이 위치한 녹원사는 어머니에 대한 추의 관념이 공간으로 변형되어 마음껏 악을 저지를 공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청년기
이런 배신의 역사를 간직한 채 미조구치는 청년이 되며 두 명의 친구를 만난다. 한 명은 세계와의 유일한 연결 통로 역할을 하면서 세계의 밝은 면을 드러내는 쓰루카와이며, 다른 한 명은 세계와의 단절과 세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가시와기다.
말더듬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겨 타인이 말더듬을 의식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생각해온 미조구치에게 쓰루카와는 말더듬을 이상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미조구치를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미조구치가 치명적으로 여기던 말더듬이란 증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즉, 벗어날 수 없는 장애로 비롯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선사해주는 존재다. 쓰루카와는 ‘나’의 어둠을 빛으로 번역하는 능통한 번역가인 셈이다.
반면 가시와기는 미조구치와 유사하게 안짱다리라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가시와기 역시 미조구치와 유사하게도 자신의 장애를 존재의 근원으로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조구치에게 사상이나 행동을 지도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겸하는데, 가시와기의 세계관은 미조구치를 이해하는데도 아주 중요하므로 처음 가시와기가 등장해 미조구치에게 늘어놓는 장광설을 짧게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가시와기에게 안짱다리는 자신을 타자와 구별하게 하는 유일한 고유한 개성이자 자신의 존재이유, 조건이다. 그에게는 안짱다리 외에 자신의 존재조건이나 다른 개별성의 존재함을 인정할 수 없고 이 안짱다리라는 장애를 누군가가 사랑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자신만의 고유한 진리이므로, 타인으로 둘러싸여 확실치 않으며 항상 변화하는 세계와는 화해가 불가능하다. 세계 일반에선 존재의 불안이나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 따른 관계의 변화 즉, 예컨대 사랑과 같은 감정으로 말미암은 불안을 겪지만, 그에게 자신의 존재 조건인 안짱다리는 항상 ‘존재’하고 있는 확실한 것으로 어떠한 불확정성에 따른 불안도 겪지 않으며, 세계 밖에 존재함으로써 각자의 존재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두며 거리를 좁히려는 조화나 합일 등의 작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장애와 그에 대한 사랑을 조화할 수 없다는 고유한 논리와 세계관을 설명하며, 오로지 이 사실을 증명해낸 자신의 세계에만 욕망과 쾌락을 느낀다. 가시와기는 ‘미지의 인생을 견딜 수 없는’ 인식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의 존재의 확실함을 부각시킨다.
또한, 불변하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 미는 단지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아니하며 그것은 퉁소를 불면 나타나는 음악적 심상과 같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이나,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자신의 장애를 근거삼아 스스로 그 장애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 장애를 스스로 사랑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이용하여 여인들의 마음을 사거나 혹은 갈취를 통해 부수적인 물질적 이득을 챙기는데 지나지 않으며, 세계와 세계의 구성원 그 누구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자, 자신은 누구보다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만 실상은 세계 속에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축소시키는 기형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인물이다.
쓰루카와는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미조구치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악의 화신 가시와기 뿐이였다. 미조구치는 가시와기의 존재나 미에 대한 관념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지만 ‘남에게 이해될 수 없는 긍지’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으로 비롯된 사명’, 그리고 그가 성장해온 고유한 과정을 통해 ‘존재’의 불안과 미, 인식과 행동에 대한 고유한 사상을 형성한다.
가시와기를 통해 미조구치가 스스로의 사상을 형성하는 주요한 에피소드 세 가지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선 가시와기는 말을 더듬는 미조구치에게 ‘더듬어! 더듬으라니까!’라며 쓰루카와와 달리 말더듬 증상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실한 존재의 근거로 삼으라고 각인시키며, 미조구치는 가시와기의 비열함과 악덕으로부터 용기와 에너지를 얻어 ‘입을 열어, 더듬거리면서라도 무엇이건 말을 해 인생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지만, 지향하는 인생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의 간극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간극을 인식하는 순간 어김없이 금각이 나타난다.
지향하는 인생이 순간을 마음껏 웃고 즐기며 영원한 것처럼 만드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나 아닌 타인으로, 미지의 세계로, 인간의 인생에 한발짝 더 다가가려는 순간, 영원이란 미망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존재의 한시성에 대한 불안을 각인시키는 ‘금각’이 등장한다. ‘금각’은 인간의 존재의 허무를 깨닫게 하고 ‘나’의 타인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은 ‘금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인생으로부터 격리’당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선 쓰루카와와 함께 전쟁에 나가는 남편에게 차에 모유를 넣어 주던 여자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자신이 일평생 담고 있던 아름다운 우이코의 형상을 재현하여 떠올린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로 편입,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이지만, 후에 그 여자는 가시와기에 의해 근처에서 꽃꽂이를 하던 여인으로 밝혀지며 가시와기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농락을 당하여 더럽혀진 존재로 제시된다. 그 과정에서 잊을 수 없던 여자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재현을 보게 되지만, 그 변해버린 여자의 존재에 대해 미조구치는 여자의 젖가슴이 아닌 ‘금각’을 목격하고 쓰루카와와 함께 아름답고 영원히 빛날 것으로 여겨진 그 순간이 변질되어 버린 것을 깨닫고 또 다시 불변하는 ‘금각’으로부터 거부당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선 가시와기와 미조구치의 남천참묘의 공안(부처님 말씀)의 두 차례의 대화에서는 미조구치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제시된다. 남천참묘의 공안이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남천의 제자들 중 서로 다른 두 무리가 아름다운 고양이를 보고 서로 기르겠다고 싸우다가 남천에게 발각된다. 남천이 왜 다투는지 이치에 맞는 얘기를 제시하지 않으면 고양이를 베겠다고 했음에도 그 욕망을 설명치 못하자 남천은 고양이를 벴고, 나중에 남천의 제자인 조주가 이를 알고 남천 앞에서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올리고 떠나갔다. 중요한 것은 이 공안에 대한 가시와기의 해석이다.
남천참묘에 관한 첫 번째 대화에서 가시와기는 고양이로 상징되는 미는 인식하는 자의 것이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미를 인식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두 번째 남천참묘의 공안에 관한 대화에서 가시와기는 쓰루카와의 죽음이 사실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이라고 쓰루카와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변질시킴으로써, 인식만이 영원불변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한편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성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미는 인식 아래 스스로의 힘을 가지거나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대상으로 보지만, 미조구치는 이미 ‘금각’으로 대표되는 미적인 속박을 뛰어 넘어 세계를 인식하는 것에 그치면 안되고 행동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대화에서 미를 탐한다는 측면에선 고양이를 죽인 행동가 남천이 가시와기고, 그것을 관조한 태도를 가진 조주가 미조구치였다면, 두 번째 대화에서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관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조주가 가시와기라면 세계에 대해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것이 미조구치로 변화한 것이다.
미조구치의 세계는 변했다. 미는 더 이상 그를 옭아매는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인식의 차원에서 미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행동에 옮기기로 마침내 결심한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
금각을 불태워야'만' 하는 이유
미조구치는 자신이 증오하던 노사 죽이는 대신 금각을 불태우는 이유를 밝히면서, ‘인간은 필멸의 존재로 끊임없이 대체가 가능하지만, 금각과 같은 불괴의 것은 대체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죽여봐야 또 다른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하지만 금각은 그렇지 않으므로 금각을 불태워야 함’을 주장하며, ‘그동안 불멸했다하여 계속 불멸할 것을 유추하는 인간들에게 그 유추의 무의미함과 존재가 무너지는 불안을 배우게 하는 것’을 이유로 금각의 방화를 결심한다.
매춘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나듯, 미조구치는 더 이상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미적 관념의 개입을 거부하고 살아 있는 인간의 특권인 무엇인가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만끽하며, 타인에 의해 개별적 특성이 벗겨지고 보편적인 존재로 취급받으며 타인의 세계에 편입되는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영원불변한 금각과 달리 변하기 쉬운 것을 받아들이고 즐긴다는 점에서 변화하는 인간과 인간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근본 속성인 변화라는 특성을, 그리고 영원불변의 ‘미’를 제시하는 금각을 극복함으로써 그 강박에서 벗어나 어린시절 자라온 그리고 여행을 통해 본 마이즈루 해안의 석양을 떠올리며 금각의 관념 형성되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 욕구를 통해 자신을 옭아매던 금각의 ‘미’에서 해방되기 위함이 금각을 불태우는 이유다.
마음 속에서 체화된 임제록의 시중의 유명한 구절은 평상시와 달리 더듬지 않고 거침없이 나온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투탈자재(깨달아 자기로 존재)해지리라.’
금각을 만나면 금각을 죽여야 한다.
금각의 의미
그렇다면 금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금각은 텍스트의 내용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에는 다음과 같은 상징의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를 대비하여, 금각은 내 세계로 포섭할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워주는 존재다. 자신의 존재는 다른 것들의 존재와는 다르다. 이 다름을 기준으로 나와 세계를 이해한다면, 필히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긴다. 나 이외의 사물과 타인으로 둘러싸인 불안한 세계로, 그 미지 세계에 한 걸음 내딛으려 할때마다 등장하는 금각의 존재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그 두려움을 날려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미지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이라는 것을 대비하여, 금각은 영원불변을 상징하며 금각과 대비되는 인간의 한시성을 드러낸다. 금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목표인 영원함을 바라는 미망과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를 드러내고, 허무로부터 오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의 불안을 폭로하는 존재다.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영원이란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불안을 긍정하고, 비로소 절대 이룰 수 없는 미망이 아닌 그 한계를 인정하고 진정한 인생을 추구할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의 인생이란 주어진 시간 속에 영원이란 말로 충분치 못할 순간들을 만끽하고 즐기며 누리는 것이다. 영원이란 말은 오히려 현재를 충실히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미를 인식함에 있어 직접 보는 것과 관념을 떠올리는 것을 대비하여, 금각은 어린 시절 미와 추를 결정짓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즉, 타인으로부터 형성된 미적 판단 기준에 따라 형성된 미의 관점을 상징한다. 미조구치는 많은 변형과 왜곡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에서 금각을 이해했지만, 근본적으로 실제로 살아있는 생명의 증거인 ‘보는’ 행위를 통해 실제로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했음에도 아름답다라는 아버지의 기준에 의해 평생을 아름답다 여기며 그 관념을 통해 미조구치는 계속해서 고통받았다.
‘본다는 것은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 있다.’
미조구치는 아버지의 아름다움과 가시와기의 아름다움에 저항하여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으로 나아간다.
네 번째로는 선천적인 장애 및 가족관계에서 애착의 부재로 인한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떠올리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제 아무리 신나는 음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에 들었던 음악이라면 수년 후에 듣는다해도 여전히 불우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금각사는 그런 존재다. 세계로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나를 밀어내게 하고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결점들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된다.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만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
후기
<금각사>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실제 금각사 방화사건을 5년동안 취재하여 작성한 소설이다. 실제 금각사 방화를 저지른 사건을 모티브로 단순한 범인의 동기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과 불안을 접목시키고 행위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인생의 문제와 갈림길에 대한 해결을, 그리고 영원이란 이룰 수 없는 갈애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불교적 관념을 덧입혀 탁월한 이야기를 직조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 일반의 거시적인 문제 외에도 독자 개인에게 자신이 진정한 인생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방해물, 예컨대 콤플렉스나 세계와의 충돌 등의 문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독자 개인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고 극복해보려는 용기를 제공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물음을 던지고, 대답을 한다. 당신의 삶을 방해하는 금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금각은 불태워야 한다고.
그런 점에서 내가 일문학 중에서 가장 많이 읽어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는 차이가 있다. (인간실격은 요조의 심정에 공감하기 어렵다보니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읽었는데 여전히 썩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요조의 삶에 대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금각사>의 미조구치와 <인간 실격>의 요조는 모두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래의 삶을 위해선 과거의 삶을 뛰어넘어야 할 필연적 의무를 가진 인물들이다. 그들은 과거를 뛰어넘기 위해 과거를 파괴할 힘을 발산하는데, 요조가 마약과 자살 시도 등으로 자기를 파괴한다면, 미조구치는 문제의 원인인 금각을 파괴한다. 그것은 순수하게 남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인간 실격>보단 <금각사>에서 등장하는 미조구치의 모습에서 더욱 삶에의 고양감과 도취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역설적으로 실제 미시마 유키오의 최후와 대비되어 담배를 물고 ‘살기 위해’ 한숨 짓는 마지막 결말의 극적인 성격이 더욱 부각된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마주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할 수 있고, 또는 의도적으로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을 시도한다. 실제로 뛰어난 작가 역시 독자의 물음과 시도에 응답하여 다양한 반응을 만들어내게끔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금각사>는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학작품 사상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유희 중 하나일 것이고,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과 세계가 담긴 뛰어난 문학작품이자, 인류에게 선사하는 크나큰 선물이다.
<금각사>는 한동안 내가 문학작품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치 <금각사> 속의 금각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새긴 금각사란 하나의 기준이, 언젠가 내 안의 또 다른 변화와 이를 통한 창조로 스스로 허물고 무너뜨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 위대한 순간이 무르익기를 읽고 쓰고 생각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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