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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dcinside.com/board/reading/506337?headid=&recommend=&s_type=subject_m&serval=%EC%B5%9C%EC%9E%AC%EC%84%9C최재서저 햄릿 광고 보고 든 생각“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이런 번역을 최고라고 칭한다는 말을 들으니손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있나 저 번역은 틀니감성이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번역임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반m.dcinside.com
이 글은 「최재서저 햄릿 광고 보고 든 생각」이라는 글에 대한 비평문으로 최재서의 번역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작성된 글이다.
위 글의 최재서 비판 내용이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가톨릭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신도>라는 사실을 입증해야할 것이다.
비판자는 아래의 발췌 구절에서 나타난 가톨릭적인 중의성을 현대적 의미에서의 중립성과 오해하고 있다. 가톨릭적인 중의성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또는 불가지론적 포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래의 문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중립성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절은 <종교에 대한 확신>을 담은 중의적인 구절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존재와 비존재 구분><구원과 구원되지 못함의 구분><삶과 죽음의 구분><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의 구분>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이러한 표현법에는 확실히,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 구원과 구원되지 못함의 구분, 삶과 죽음의 구분,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의 구분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있다는 비판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선악의 이원론적 구분 속에서만 나타나는 일종의 독선이다. 그것은 가톨릭적 입장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종교적인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와 동시에 중의적인 표현 역시 담고 있다. 후술되어지는 행들의 내용은 이러한 표현법을 정확하게 반복하고 있다. 살아 부지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고통에 이르는 불행을 의미한다. 죽어 없어지는 것은 환난을 회피하는 행복을 의미한다.
구원이 불행이 되고, 구원되지 못함이 행복이 되어버리는, 중의성의 표현법은 확실히 “살다” “죽다”라는 표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더욱이 ‘살다’와 ‘죽다’라는 표현법 뒤에 덧붙여진 ‘부지할 것’과 ‘없어질 것’이라는 표현법은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의 명확성을 나타내주는 단어로써 사용되어지고 있다.
확실히 최재서는 <기독교 역사상>의 사고 일방을 성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종철(민음사 역본)과는 다른 입지에 위치하고 있다. 최종철은 확실히, 이러한 <기독교 역사상>의 사고일방을 제거하고 ‘있다’와 ‘없다’라는 표현법을 대신하여,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조차도 모호해진 중성화된 기독교상을 보지(保持)하고자 한다. 향후 글 하나를 더 적을 건데,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적인 <비역사적>이며 오직 <성경적>인 해석은 셰익스피어와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
죽는 일은 잠드는 일.
잔다! 그래 꿈도 꾸겠지! 아!
꿈을 꾼다면 문제다.
셰익스피어는 꿈이라는 개념을 배척한다. 위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는 현실세계에서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을 피하고자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고난을 악의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 환상에 도취되어서 잠드는 행위를 거부한다. 여기서도 선악의 중의성의 표현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확실히 여기서 선과 악은 모호한 경계를 이룬다.
『햄릿』에서의 구원은 죽음이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구원받았다. 햄릿은 복수를 완수함으로써 구원 받았다. 그들이 불행했기 때문에, 즉 비극적이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중의성의 표현은 작품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있게 표현된다. 죄①를 행하던 유령은 누군가의 죄②에 의해서 독살당했기 때문에 구원ㅡ여기서 연옥의 개념이 도입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하나 더 적음ㅡ받았다. 햄릿은 유령의 복수청탁을 완료함으로써, 즉 살인이라는 죄③를 저지름으로써 구원받았다. ①②③의 죄는 서로 유기성을 가지며 연결되고 있으며, 이러한 유기적인 복수 행위는 죄 개념의 인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장치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죄에 대한 인식 속에 우리는 죽음으로써 구원받는다. 죽음에 대한 결과가 구원이라니? 이 얼마나 중의적인 표현인가? 유령은 이러한 죄의 개념을 햄릿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극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나를 잊지말아라”라는 극중에서 반복되는 표현법은 자신의 복수의 청탁을 잊지말라는 표현법으로써, 향후 햄릿의 표현은 이를 명확하게 암시한다.
가만 있거라! 고운 오필리아가 오신다.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를 잊지 말아주소서.
즉 우리는 죄에 죽어야만 하며 새 생명으로 부활해야 하고, 고통과 죽음을 죄에 대한 형벌로서 우리가 육적으로 부활하기까지 짊어져야 한다.
햄릿의 중의성, 즉 이중적인 의미의 함축은 세속화된 근대의 사고과정에서 생기는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톨릭적 사고방식 일방에서 도출된>, 다시 말해서 세속화된 사고와 매우 동떨어진 도덕신학자로서의 양심과 실행의 문제인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18세기와 19세기 식의 절대적 휴머니티의 옹호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결코 볼테르주의자도, 루소주의자도 아니며 자유사상가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통상의 자유는 20세기의 <문호개방>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무역이나 자유경제라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技術) 이전의 시대의 단순한 수단이다. 그러나 선교의 자유는 중세적인 사고와 언어관용에서 자유(Libertas)가 권리와 같은 의미였던 것과 같이 하나의 기독교 교회의 자유이다. 따라서 여기서 셰익스피어에 있어서는 기독교 유럽이 아직도 대지의 중심이며 역사적으로 완전히 구체적으로 예루살렘과 로마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의 중의적인 표현법에 의해 신학으로부터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이 생겨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일반적인 도덕론으로부터 다시 근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자연적> 도덕론과 순전한 이성법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맹아의 일관된 발전 속에 완전히 이질적인 의도가 침입하여 가톨릭적인 개념과 공식들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게 한 하나의 돌파구를 열어 놓았다. 추상적으로 파악된 개개의 명제와 개념은 복합적인 사고구조의 구체적인 통일로부터, 그리고 또한 역사적 상황의 관련으로부터 쉽게 분리되어서, 고립된 테제와 공식으로서 완전히 다른 상황에로 쉽게 전용된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그러한 논거의 이용은 햄릿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가톨릭적 성격을 중성화시켜버렸다.
두문단 읽고 건너뜀.. 아네….. 무슨 토마스 아퀴나스세여?
영문학과게이노
애초에 최재서 번역이 영문과 교수들한테 빨리는 부분은 저 문장이 아니고 다른 문장들인데다, 그냥 다 떠나서 한국어 퀄리티 자체가 goat라서 번역 goat라는 건데 저 사람은 맥락을 하나도 못 잡고 있음
그냥 즐겁게 연극보듯이 희곡을 읽으면 될 것을..... 머할라고 대가리 아프게 머리쓰냐.... 시나라오 작가나 희곡작가 같으면 참고대상이 되겠지만, 나같이 그저 이야기를 즐기는 스타일은 말담긴 심오한 뜻은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