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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노론 척사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46, 2008


18세기에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자 노론 역시 척사론을 펼침. 이는 북학 계열과 산림 계열로 나누어진다. 박지원은 청의 문물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남인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에게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204~205) 김건순과 김백순 등 노론 인사들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생김. 이에 대해 노론 내부에서 우려함.

이 과정에서 노론 산림 박윤원과 유한준 등이 척사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유한준을 따랐던 유성주 역시 주목할 만하다. 유성주는 지구변을 저술하여 서학을 비판했다. 이에 반해 호서 지역 노론들은 서학 비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북학파들은 교화주의적으로 천주교 문제를 처리하려 했고, 산림 계열은 강경론을 주장했으며,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신유사옥 이후 척사론은 더욱 강경해졌다. 특히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노론 척사론자들의 불안감은 매우 켜졌다. (210~211) 천주교는 성리학적 자부심이 큰 영남 지방에서도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오희상은 영남 지역 천주교 문제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또한 유성주는 칠극등의 저서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이익의 보유론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212~213) 오희상은 안정복의 천학고를 읽고 그 척사 논리를 비판하였다. 홍직필은 오희상보다 더욱 천학고의 척사 논리를 냉소적으로 보았다. (213~214) 반면 북학론자들은 상대적으로 천주교에 낙관적 태도를 보였다. (215)

 

노론 척사론은 남인계 척사론과 마찬가지로 유학의 일반론적 관점에서 천주교를 비판한다. 그러나 노론 척사론자들은 서학과 양명학을 연결시켜 비판하고 있다. 홍직필과 유성주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은 특히 양명좌파 중 하나인 태주학파와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노론 산림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비판적이었음. 이는 노론 내부 북학론에 대한 단속 차원이었다. 이들은 서학을 매개로 천주교가 전파된다고 생각했기에, 서양 과학기술에도 비판적이었다. (221)

 

노론 척사론은 1830년대 이항로와 이정관을 통해 더욱 발전하였다. 이항로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천지의 주재자를 설정한 것을 주로 비판했으며, 서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유발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정관은 벽사변증에서 남인의 척사론을 비판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또한 북학론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도에 대해 교화주의적 태도를 유지했다. 윤종의는 벽위신편에서 남인 척사서에 대한 비판보다 서양의 과학기술이 침략의 수단이며 서양 과학기술의 원류가 중국에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는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기존 노론 척사서의 당파성을 극복했다는 의의가 있다. (226~227) 이 같은 변화는 노론 척사론이 기존 천주교에서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