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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글의 목적을 먼저 밝히자면 이 글은 정석적인 독서 감상문이 이나 리뷰가 아닌 일종의 새로운 접근 방식의 독서 감상문입니다. 어떤것이냐면 스스로가 어떤 가상이나 현실의 인물이 된것처럼 "연기"하며 소설과 글들을 '삐딱선' 탄체 리뷰하고 설명하는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근본적으로 옹호될수 없고 정당화될수 없는 인물로 빙의하여 이 감상문을 이끌어갈것입니다. 제가 이러는 이유는 글과 문학들에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여기에 있는 분들에게 흥미를 제공하고 만약 가능하다면 새로운 건설적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질수 있는 토론장을 열고자 하는것입니다.




멋진 신세계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나약하며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들의 정신적인 미덕들은 그런 행복과 양립할수 없다. 인간들은 설탕을 원하며 성관계를 원하며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인 미덕은 그런 것들과 완전히 반대된다.


고상한 시와 문학들은 고뇌를 낳으며 고통이 되며 사랑은 이별을 낳으며 슬픔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고통이야 말로 고상함의 근원이다. 만약 어떤 인간이 사춘기의 슬픔과 고뇌를 겪지 못한다면 결코 어른이 될수 없을테니 말이다. 고통이란 인간 정신의 성장의 필수적인 영양제이다. 그런면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은 신생아라고 할수 있다. 사실 그 소설의 모든 문명인들은 신생아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에서 유일하게 사춘기를 겪은 인류 최후의 인간인 “야만인”이 보이는 행동은 모든 정신적 미덕의 종말에 관한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논평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 책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준다. 나 또한 시골에서 자랐으며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통을 겪었다.또한 문학적인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그러기에 나는 야만인에게 깊은 공감을 갖고 있다.


이것이 자본사회의 결말이다. 모든 어른다움을 잃은 신생아로의 퇴행! 그러나 나는 이 훌륭한 저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 체제의 관리자는 인간들이 왜 고상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거기서 야만인은 제대로된 답을 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사랑의 고상함 같은 정신적 가치들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용서를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다. 그러나 알바니아인들은 복수를 최고의 것이라고 믿는다. 고상한 인간들은 그것을 문화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니 가치의 훌륭함의 객관적인 서열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들은 일종의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하여 야만인은 관리자로 대표되는 쾌락주의와의 싸움에서 지고 만다. 쾌락대신 고상함을 추구해야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 그가 진정 고귀해지는 지점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모든 논증이 실패했음에도 그것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믿는 인간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나는 선택했다 총통의 이상을 이것은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야만인처럼 그것을 비웃는 무신론적 허무주의자들에게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너무나 비겁하고 나약하고 사악하다. 그럼 어떻게 이것을 막을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들을 타락이 아닌 고귀함으로 이끌수 있을까?


과거 나는 기독교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단심문관 이야기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있다. 그 이단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외친다. 인간들에게는 빵과 권력과 기적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모든걸 거부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나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단심문관의 방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사악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은 배부른 돼지가 될뿐이다. 인간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해도 결코 천국의 문이 아닌 지옥의 문을 선택할것임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쓸모 없는 자유를 준 예수는 머저리이다.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 성장은 오직 실제적인 방법만으로 가능하다. 사람들을 빵으로 매수하고 권력으로 공포를 심어주고 기적을 통해서 경외감을 심어줘야만 그들을 성자로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생물학주의자들의 방법을 따를 필요가있다. 인간들은 그저 동물이다. 성기를 자극하면 신음소리를 뱉어내며 때리면 비명을 지르며 설탕 알갱이를 핥는것에 집착하는 동물말이다.그러니 우리는 인간들을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대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방식이 고상하지 않으며 천박하다고 할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저열함의 극치로 보이겠지만 우리의 부모들도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가? 우리는 착한일을 할 때 칭찬이나 사탕을 받음으로 그것을 우리의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 우리 부모들이 적절한 야단과 공포를 통해서 우리를 키우지 않았는가? 그리고 과거 우리들은 우리의 부모님을 우리보다 상위의 존재로서 신성시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안된다면 우리 부모들도 틀렸다는 것인가? 아니! 예수의 방법이야 말로 틀렸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들에게 정신적 미덕을 배양할 방법인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과 관리자의 모순적인 종합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그저 동물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고귀해져야함 또한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들을 동물을 키우듯이 행복과 채찍 그리고 경외감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고귀한 인간들의 천국인 것이다. 그 불쌍한 야만인은 이 놀라운 진리를 보지 못했다. 인간들을 진정 천국으로 인도할 유일한 방법은 지옥의 방법이라는 진리를 말이다. 그리고 이 천국이 도래하고 나서 나는 당당하게 도스토예프스키와 예수에게 가장 격렬한 폭소를 바치며서 이렇게 조롱할 것이다.


“오, 그리스도여 제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



(괴벨스 선전장관의 일기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