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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달 만큼 많이 읽진 않았지만 나름 부지런하고 알차게 읽었던 것 같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읽은 책들이 하나같이 잘 쓰인 책들이라 몹시 만족스러웠다.

1. 동물농장 (Animal F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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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동물농장 中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1945년에 출간한 풍자 소설 동물농장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사실 학창 시절 영어 수업시간에 이 작품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보니 줄거리도 다 알고 있어서 봐야 할지 망설였다. 그래도 책 전체 내용을 봐야 독서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꼭 봐야겠다며 벼르고 있다가 우연히도 근처 서점에서 팔고 있길래 냉큼 집어왔다. 이 책은 옛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 (현재 미얀마) 에서 경찰로 일하다가 조국의 제국주의에 신물이 나서 홧김에 때려친 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글을 써오던 오웰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어보면서 작가의 탄탄히 다져진 필력, 냉소적인 코미디와 신랄한 풍자를 완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존스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환경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일하던 동물들이 똑똑한 고령의 돼지인 메이저 영감의 일장연설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메이저 영감은 자기의 임종이 머지 않았다면서 동물들에게 메시지를 설파하는데, 농장에 있는 동물들은 죽어라 일하지만 작업의 산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농장주인 인간들에게 고스란히 다 빼앗기는 데다 인간의 식욕을 위해 목숨까지 잃는 동물들의 세태에 분노하며 더이상 이를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다. 그러고 나서 인간을 타도하고, 동물들이 공평히 일하여 그 산물도 동등히 나누는 '동물주의' 를 주창하며 다가올 미래에 인간을 축출할 혁명에 대비하라는 말을 남기며 얼마 안가 숨을 거둔다. 그 후 몇 달 뒤 농장주인 존스 씨가 술에 취해 동물들의 사료를 주는 일마저 깜박 잊어버리자 분노한 동물들이 봉기하여 존스 씨와 농장 직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메이저 영감의 동물주의 설파에 앞장 섰던 돼지들인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이 주도권을 잡아 농장 이름도 매너 농장에 동물 농장으로 바꾸고 농장 내 동물들을 진두지휘하며 농사를 짓자 존스 씨가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작황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동물 농장엔 장밋빛 미래만 기다리는 줄 알았지만 농장 재탈환을 호시탐탐 노리는 인간들의 침략, 지도자인 스노우볼과 나폴레옹의 권력투쟁을 거치며 모든 동물들을 위한 이상향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억압적인 곳으로 변모해 가는 농장을 보여주는 게 책의 핵심 줄거리이다.

작가인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 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기도 하고 1946년 출간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 ' 에서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예술에 정치적인 저작들을 접목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적인 글을 집필해왔던 사람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동물농장에서도 오웰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반감을 드러냈던 사회주의자였는데, 이런 정치적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줬던 사례가 바로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것이었다. 당시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하던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총선으로 집권한 좌파 연립 정부 (공화군) 에 군부와 파시스트를 비롯한 우파 연합세력 (반란군) 이 반발하면서 무력봉기를 일으켰던 게 내전으로 번진 건데 조지 오웰은 유럽에서 득세하고 있던 파시즘 확산을 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공화군 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 발을 딛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전장을 누볐고 한번은 총알이 목을 관통하면서 죽을뻔했던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 오웰이 염증과 실망감을 느끼며  스페인을 떠나게 된 계기는 바로 공화군 내 좌파 세력들 간에 피튀기는 내부 분쟁이었다. 내부 분쟁에서 가장 중심이 됐던 세력이 소련을 뒷배로 뒀던 스탈린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교조주의적이고 맹목적인 소련 추종도 문제가 되었지만 틈만 나면 아나키스트 같은 비스탈린주의계 좌파세력을 ‘제5열’ 과 ‘트로츠키주의자’ 로 몰아 처형하거나 투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웰의 경우에도 소속된 의용대가 아나키스트 계열 단체였다보니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수배령이 나는 바람에 스페인을 떠나게 되었다. 

동물농장에서 풍자 대상으로 삼는게 바로 스페인 내전에서 거하게 깽판을 놓았던 스탈린주의자들이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압제를 일삼던 제정 러시아를 사회주의 깃발 아래 전복시켰지만 (러시아 혁명), 혁명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권력에만 몰두하여 한때 함께했던 혁명 동지들과 소련에 이바지한 인재들을 자신의 독재행각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숙청하고  정치경찰을 동원한 공포정치를 통해 소련을 제정 러시아 뺨치는 억압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오웰은 사회주의 이상은 잊어버리고 전체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소련을 향한 환멸을 우화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방식으로 멋들어지게 표현하였다. 오웰의 개인적인 경험과 출간 당시 시류를 비춰볼 때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은 변질된 소련 체제의 알레고리로 비춰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계급우화가 담아내고 있는 ‘타락한 혁명가’ 구도의 서사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있는 역사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보편성 덕에 출간된지 70년이 훌쩍 지난 현재도 이 작품이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꼭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이 들어가지 않아도 작가의 필력 덕에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양이 부담스럽거나 내용이 어렵지 않은 편이므로 고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입문작으로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2.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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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모든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띄었으며 기운차고 패배를 모르는 듯 하였다. (Everything about him was old except his eyes and they were the same as the sea and were cheerful and undefeated.)”

노인과 바다 中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커리어 말년에 집필한 노인과 바다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사실 번역본을 작년에 한 번 읽어 본 것을 비롯해 여러번 읽어본 적이 있어서 굳이 또 봐야하나 싶기도 하지만 영문학 작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보니 꼭 원서로 읽어보고 싶어서 책을 구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책은 84일간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 운 없는 어부 산티아고가 여느때와 같이 조각배를 타고 낚시를 나서다가 큰 청새치를 맞닥뜨리게 되며 펼치는 사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워드가 ‘백전불굴의 정신’ 과 ‘인간찬가’ 인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고통’ 이라는 단어도 이 책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일단 본작의 주인공인 산티아고부터가 노화로 인해 기력이 쇠해지는 게 역력한 노인이기도 하거니와 낚시를 하며 갈고리에 걸린 청새치가 1500 파운드 (약 680 kg) 가 넘는 거구다 보니 낚싯줄로 전해지는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을 어깨와 맨손으로 견뎌낸다. 또 버티는 과정으로 인해 손바닥은 걸레짝이 되도록 찢어지고 물고기의 움직임에 휘청거리면서 넘어지다 보니 얼굴을 비롯해 몸 이곳저곳을 다치게 되는 등 가공할 만한 고통을 겪게 된다. 오죽하면 정신이 몽롱해질 때도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정신을 다잡는 장면도 나올 정도이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가면서 기운이 없어져가고, 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인생을 은유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픈 대목이었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파괴될지언정 패배는 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정신과 대조되면서 감정적인 고조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인 소설이다.

내가 영어 원서를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지난 날 읽어봤던 영어 책들과 비교했을 때 노인과 바다는 문장 구성이 간단한 편이고 어휘도 필요한 만큼 절제해서 사용했다는 인상이 들었다. 비유를 곁들여 주변 자연환경을 세세히 묘사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깔끔한 맛이 있긴 하지만 화려하면서도 장황하게 문장을 늘여서 썼던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과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가 확실히 두드러진다. 이런 까닭으로 혹시라도 영어에 자신감이 붙어서 고전 영문학에 도전할 의향이 생겼다면 노인과 바다를 원서 입문작으로 적극 추천한다.

3. 백년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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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백년의 고독 中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세계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 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을 읽어봤다.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콜롬비아 내전 참전용사인 외할아버지가 겪었던 세상풍파와 미신을 곧잘 믿었던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들려줬던 환상적인 민담들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또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자랑하는 장르 중 하나인 '마술적 사실주의' 의 효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콜롬비아 북동부 해안 지역 부근 어느 밀림 지대에 '마콘도' 라는 도시를 세운 '부엔디아 가 (家)' 의 100년 간의 연대기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이야기가 원체 방대하다보니 진행도에 따라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 차츰 바뀌는데 초반부에는 마콘도를 세운 가장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차남이자 초인 수준의 카리스마와 재능으로 온 내전이 한창이던 콜롬비아를 휘저은 자유파 반군 지도자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극의 중심이 되고, 중반부에는 바깥 세상과 고립되었던 마콘도에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들여놓는 쌍둥이 형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주요 등장인물이 되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작은 증조할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을 똑 닮은 고독한 청년 아우렐리아노가 극을 이끈다. 대충 주인공 이름들만 읊어도 알 수 있겠지만 세대를 거쳐도 가족들 이름이 거의 똑같이 지었는데 성격까지 비슷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바뀌고 새로운 일들이 벌여지지만 이들의 비슷한 이름과 행동으로 인해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고 순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거야말로 이 책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작중 주요 배경이 되는 마콘도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발생하고 선사시대와 같은 활력이 넘쳐나는 환상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그 영향 덕인지 모르겠지만 등장인물들도 공중부양을 한다던지 미래를 예지하기도 하고, 눈빛 만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까닭에 작중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황당무계한 민간설화 같은 성격을 띄는데, 작가의 물 흐르듯이 유려한 문장 덕에 다분히 낯선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보노라면 어렸을 적 어른들이 들려주던 전래동화처럼 포근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무릉도원과 같은 마콘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깥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휘말려 적잖은 변화를 겪고 마는데 가톨릭의 도래, 중앙정부에서 보낸 시장으로 대표되는 국가 시스템의 도입, 온 땅을 피로 물들인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치열한 내전,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들여온 자본주의와 이를 극대하기 위해 만연한 착취 같이 콜롬비아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전반에 산재한 군내나는 현실적인 요소들이 마콘도에도 스며들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마콘도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마콘도의 환상적인 면모에서 비롯된 경이로움과 현실적인 면모에서 비롯된 씁쓸함을 한꺼번에 느끼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작품의 첫 문장으로 굉장히 유명하고 널리 회자되는데,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한 문장 안에 녹아들어 있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작가는 작중 사건을 다룬 묘사할 때 현재에만 충실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사를 풀어낸다. 이렇게 본 작품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시간적 배경의 복잡성과 마콘도에서 드러나는 공간적 배경의 복합성이 배합되어 있는 총체적인 작품인데,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른 이야기에서는 쉬이 느낄 수 없는 황홀한 감정을 선사한다. 나도 읽으면서 책에 감탄한 적이 수없이 많은데 괜히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평가 받는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런 끝내주는 작가를 보유한 콜롬비아에 질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꼭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여담으로 나는 민음사 역본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특유의 만연체를 고스란히 담아내려는 노력이 보였고 주석도 충실한 편이다 보니 제법 괜찮은 번역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몇몇 오탈자들이 눈에 밟히고 너무 만연체를 충실히 옮겨 내려다 보니 가끔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아쉬웠다. 혹시라도 백년의 고독을 읽어보실 생각이 있다면 왠만해서는 민음사 번역본을 추천드리지만 만약 만연체에 알레르기 수준으로 거부감이 있다면 영역본 기반의 중역본이지만 깔끔하게 윤문이 된 문학사상 판 '백년 동안의 고독' 이 있으니 그걸로라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4. 거미여인의 키스 (El beso de la mujer ar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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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거미여인의 키스 中

아르헨티나 태생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마누엘 푸익 (Manuel Puig) 이 1975년 출간한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어봤다. 아마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더 유명할 거다. 이전부터 푸익은 라틴아메리카 문학계에서는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극장에서 영화를 자주 봤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극장에 갔을 정도로 영화광이다 보니 영화감독을 지망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실험영화 공부도 했었고 영화 조감독으로도 일했지만, 정작 정식 감독 데뷔는 잘 안풀렸던 모양인지 번역과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어 프랑스에서 일하던 시절 짬짜미를 내며 집필했던 '리타 헤이워스의 배신 (La tracion de Rita Hayworth) 을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다. 그 영향 덕에 본 작품에서도 영화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고, 영화 연출기법의 영향을 받은 듯한 부분들이 글 안에서도 포착된다.

본 작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두 죄수인 발렌틴과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발렌틴은 노동운동가이자 좌익 게릴라로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죄수였고, 몰리나는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진 혐의로 수감되어 8년 징역을 선고받은 게이 (사실 작중 묘사를 보면 자신의 성별을 여자로 인식하는 트렌스젠더에 가깝지만) 죄수였다. 교도소에서 나날이 원체 끔찍하다보니 시간을 죽이고 수감생활의 고통을 잊고자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자신이 봤던 영화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야기 해주는게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이다. 잠자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하는게 대부분이라 몰리나가 간혹 자기가 배고프다거나 졸리다는 이유로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이야기를 끊는 절단신공도 선보이며 발렌틴을 애타게 만드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천일야화가 연상되었다.

책에서 몰리나가 해주는 영화는 총 6편인데 이중에서는 캣 피플 (Cat People), 매혹의 오두막 (The Enchanted Cottage),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I Walked With A Zombie) 같은 실제 영화에서 따온 것도 있고 특정 장르의 문법이나 클리셰 등을 따와서 작가가 만든 허구의 영화도 있다. 영화를 좋아하거나 영화의 영향을 받은 소설가들은 보통 시네필 (Cinéphile) 이나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예술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오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 책의 경우에는 킬링타임용 내지는 B급 영화 색채가 짙은 대중적인 성향의 영화들을 바탕으로 한 게 제법 특이하다. 작중에서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봤던 영화를 곧이곧대로 이야기 해주는 게 아니라 발렌틴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빗대서 줄거리를 편집해서 이야기 해주는데, 이는 전반적인 작풍에도 해당되는 점입니다. 푸익은 단순히 요즘 유행하는 '결말포함' 류의 유튜브 영화 리뷰 같이 줄거리만 나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대중영화에서 관객 취향에 맞추기 위해 넣는 상업적 클리셰들을 재해석한 다음에 본인의 작품 내 등장인물들이 겪는 상황에 교묘히 엮어넣었다. 이런 방식으로 작중 언급되는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암시하고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완벽히 묘사해 내어 독자로 하여금 발렌틴과 몰리나의 애절한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들어 놓는다.

또한 본작의 특징 중 하나로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각주들이 있다. 중간에 몰리나가 잘라먹은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해 주는 주석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석의 내용은 프로이트와 마르쿠제를 비롯한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들이 동성애에 관해 연구한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주석을 접할 때는 일견 작중 내용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딱딱한 텍스트로 보일 수 있지만, 꾸준히 읽어 나가다보면 성소수자인 몰리나가 처했었던 환경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 주는 요소임을 알게된다. 대부분이 대화 위주인 작품이다보니 등장인물들의 배경이나 심리를 직접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아예 없는데 영화 줄거리와 각주들은 설명의 부재로 부족해 보인 내용들을 충실하게 상호보완해 준다. 조금 구성이 산만해 보일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험적인 방식으로 감정의 고조를 일으키는 걸작이니 만큼 일독을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5. 바스커빌 가문의 개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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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괴망측한 사건일수록 응당 신중하게 관찰해 보아야 하네. 사건 전체를 복잡하게 만드는 듯한 측면에 대해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한다면 이것이 바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열쇠가 될 가능성이 높지.“

바스커빌 가문의 개 中

1901년 아서 코난 도일이 출간한 셜록 홈즈 시리즈 장편 소설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읽어봤다. 지난 1월에 읽었던 네 사람의 서명 이후로 세 달만에 읽어보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다. 사실 이 책이랑 단편집인 셜록 홈즈의 모험 둘 중 어느 걸 먼저 읽을까 고민했는데 후자는 양이 좀 많은 편이라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골랐다.

본작은 홈즈의 베이커가 사무실에 지팡이를 놓고 갔었던 덜렁이 시골의사 제임스 모티머가 기이한 이야기와 함께 사건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모티머가 들려준 이야기는 잉글랜드 서남부 데본주 다트머스 근교를 영지로 둔 귀족 가문 바스커빌 가(家) 에 내려져온 기괴한 전설이었다. 영국 내전이 한창이던 17세기 경 가주였던 휴고 바스커빌이 포악한 성정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정도가 심해서 외간 처녀를 자기 맘에 든다면서 성 미카엘 축일 날 납치하여 자신의 자택에 가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다 한밤에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던 중 처녀가 몰래 탈출한 것을 알게 되자 휴고는 악마에 혼을 팔아서라도 처녀를 되찾겠다며 추격에 나섰다. 이윽고 친구들도 추격에 나서 따라가 보았는데 마치 지옥에서라도 온듯이 눈과 입에서 불을 뿜던 사냥개에 물려 죽어가던 휴고를 목격하였다. 이 참상은 대대손손 바스커빌가 일원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던 홈즈와 왓슨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황당해 하지만 모티머는 이어서 본인과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자 최근까지 바스커빌 가의 수장이었던 찰스 바스커빌 경이 한밤 중 저택 근처 산책로에서 산책을 하다가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는데 시신 부근에는 어마하게 큰 사냥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고 전한다. 찰스 경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모티머 본인이 유언 집행을 맡게어 최우선 상속자인 찰스 경의 조카 헨리 바스커빌의 유산 상속을 도와주고 있는데, 참극이 벌어졌던 바스커빌 저택에 입주를 권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 중이라며 홈즈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에 홈즈는 24시간 정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하루 뒤에 헨리 바스커빌과 함께 사무실에 돌아오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1일 후 모티머와 함께 베이커가로 온 헨리는 홈즈와 왓슨에게 이상한 일이 두가지 정도 발생했다고 얘기한다. 하나는 자신의 구두가 딱 한짝만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고 또 하나는 누군가로부터 황무지 근처에 있는 저택에 오지말라며 경고의 편지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린 홈즈와 왓슨은 본격적으로 사건 수사에 뛰어들게 된다.

이전에 읽었던 장편 소설들과 이 작품 사이에서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었다. 주홍색 연구와 네 사람의 서명은 추리 소설이기도 하지만 미국, 인도에서의 이야기도 같이 들어간 모험 활극이였고, 구성도 1부는 사건 추리 파트, 2부는 진범의 사연 풀이 파트 정도로 나뉘었는데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를 풀어내는데만 초점을 맞췄고, 파트 구별없이 한 사건을 기준으로 모든 내용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특히 본작의 경우에서는 음습한 저택에서 미지의 존재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고딕 소설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읽었던 장편 소설 중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상술하였듯이 한 사건에만 초점을 맞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데 그렇다 보니 서사에 확실히 힘을 준 게 눈에 띄었다. 고딕 소설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만큼 바스커빌 가 저택의 음침하고 황령한 주위 환경을 공들여 묘사해 놓았고 이를 서사에도 잘 반영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며 극을 이끌어나간다. 또, 지나가듯이 언급되는 사소한 것들이 극이 진행됨에 따라 톱니바퀴 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서 작가가 여간 신경쓴 게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게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고전이자 표본 같은 작품이라서 추리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앳저녁에 눈치채고 진상을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만듬새는 준수한 편이니만큼 혹시라도 읽을 책을 고민하고 계시다면 가볍게 이 책을 추천드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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