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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취미로 하기 전에, 다자이가 취미였던 적이 있었다.
다자이가 쓴 소설만 읽던, 그가 쓴 글이 아니면 한 줄도 못 읽던 시절. 한 반년쯤이었나.
물론 다자이가 짧은 단편 위주로 글을 써서 문학 입문자들에게 좋은 작가인 것도 맞지만,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정말로 다자이의 문학을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써 체화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과몰입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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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곤 연금술밖에 없다.
추에서 미를,
패배에서 승리를,
슬픔에서 기쁨을,
무의미에서 의미를,
돌덩이를 금으로 바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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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은 엉터리지만, 내겐 큰 뜻이 있어. 나는 지금 그 큰 뜻이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리고 있지. 자네들에게는 변변찮고 무식하고 너저분해 보이겠지만, 나는 진정한 기품이라는 게 뭔지를 알아. (...) 진정한 기품이라는 것은 새까맣고 묵직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위에 흰 국화 한 송이가 있는 모습이야. 그 토대에 더럽고 커다란 바위가 없으면 안 돼.”
<쓰가루>는 다자이가 자기 고향인 쓰가루 반도를 취재하고 쓴 기행문이다. 집안의 수치, 의절당한 존재, 어쩌면 부정한 아이였을지도 모르는 다자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근본을 확인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는 쓰가루에서의 자신을, 가족들 사이에서의 자신을 더러운 바위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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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의 문학이 전후에 이르러서야 빛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일본인들의 상처 입은 프라이드가 다자이의 문학과 맞닿는 지점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언제나 패배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을 동경한 적 없는가? 병약함을 다름답다 생각한 적은 없는가? 패배를 즐거이 여겨본 적은 없는가? 불운을 존경한 적은 없는가? 멍청함을 사랑한 적은 없는가? (<오가타씨를 죽인 자>)
결국 그는 패배, 연약함, 죽음, 멍청함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고, 그걸 소설로 썼다.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패배주의에 다름 아니다.
수년이 흐르고, 나는 이병주의 <겨울밤>을 읽었다. 그곳에 적힌 단호한 일침이 마음을 후볐다.
시는 구체적인 슬픔, 개체적인 죽음을 추상적으로 일반적으로 페인트칠해선 슬픔의 또는 죽음의 또다른 의미가 있을 것처럼 꾸밉니다.
시인은 패배를 미화해가지곤 모든 사람이 패배자가 되도록 권유합니다. 당신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러한 시인의 교활한 작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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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러운 바위의 열렬한 신도였다가, 언젠가부터 정말로 더러운 바위가 필요한 것이냐고 되묻는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런 건 아름다운 바탕을 갖지 못한 애들이나 할 법한 소리가 아니냐고.
다자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언젠가 극복해야할 작가라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더럽고 묵직한 바위 위에 핀 국화를 여전히 아름답다 여기는 나를 발견한다.
다자이 너는 청춘이라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며 적당하게 끝낼 타이밍이지만 이번엔 그렇게 끝내지 않을 테다. 다자이 너는 어린아이, 너처럼 살 수는 없지만 너를 미워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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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 다자이 좋아했다니. 고등학생 때 전집도 사서 다 읽었던 몇 안되는 작간데 이제는 그렇게 애정하는 작가라고는 못할듯
다자이 환장했었지... 지나가는 작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 같음
전집 다 읽은 사람 보니까 반갑넹 ㅋㅋ 생각보다 얼마 없더라구
좋은 감상문 잘봤어. 짧고 강렬하네, 다자이 처럼
몇살이심??
전집 다 읽은 지성인이노ㅋㅋㅋㅋ 그래도 요즘엔 나쓰메나 사카구치 안고 같은 작가를 파게 됨.ㄹㅇ 지나가는 작가.
다자이 따라서 운지는 어떤 것 같나?? 걔 추종자 한 명 따라 죽은 걸로 기억하는데
미안하다 실속없는 내용에 중간부터 스크롤 휘리릭했따
덧글 수준들 왜이러냐. 방패단 좌표 찍혔냐. 고졸좌빨작가의 마음을 네놈들따위가 알리없지.
패배를 즐거이 여기는 마음으로 하드 쓰로잉을 즐겨보면 나도 다자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다자이 능력 무효화인데요 능력명: ’인 간 실 격‘
와 너무 좋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