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중 인용하는 문구는 모두 2017년 지만지 판본이다.
0.
또 이 소설이다. 에릭 블레어의 네번째 작품이자 가장 부끄러워했던 소설 『Keep the Aspidistra Flying』. 필자는 이미 독갤에 이 소설의 리뷰를 두번이나 올린바가 있으나 원작 소설이 그러하듯 리뷰도 두번 다 제대로 말아먹었기에 대회를 빌어 세번째 리뷰를 올린다. 이 소설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도 리뷰를 더 올릴지도 모르겠다. 왜? 이 소설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픽션의 세계에서 리얼리티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성공을 예찬하는 근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낙오자의 찌질거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없다. 그래서 리뷰에서 말했듯 이 소설은 처절하게 망했다. 작중에서 나오는 표현을 빌자면 "병 속에 들어있는 가혹한 태아처럼 죽어버렸다."(157p) 그러나 아니,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한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담은 그대로 내면을 드러내고 그런 시선을 통해 세상을 어떠한 숨김없이 비굴하게 관찰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아니라 그 인간의 본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정직하며 성실하게 서술했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룬 숨겨진 명작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을 사회비평이라고 주장한 영문 위키백과의 주장에 반대한다. 책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난 현대 세계의 상황에 관심이 없소. 나 자신과 내가 신경쓰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영국 전체가 굶어 죽는다 해도 난 걱정하지 않을 것이오."(170p)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을 로맨스(6장-8장 전반부), 코미디(2장, 9장)로 개작한 영화감독 로버트 비어만(Robert Bierman)가 저자의 의도를 더 살렸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로맨스나 코미디 요소가 강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랬으면 망하지도 않았을테니까. 잘못된 리얼리즘과 잘못된 로맨스 코미디, 그렇다면 올바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소설은 그에 대하여 고민한 어느 낙오자의 부끄러운 자기고백이다.
1.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여명의 수평선 너머에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힘차게 증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기차 위에서 계몽주의자들은 근대의 도래를 선언하였다. 근대는 그렇게 인간을 해방시켰다. 산업혁명의 기적은 피지배민의 목에 차여있던 굶주림과 토지의 속박을 끊어내었고 종교와 절대왕정에 종속받지 않는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을 세상으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외로운 해방노예는 점차 자기 자신을 '스스로' 예속시키기 시작하였다. 종교에서 벗어난 대신 이데올로기에 광분하고 토지에서 벗어난 농민들은 공장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모두가 신 앞에 있던 현실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국민국가였다. 국민국가는 인간에게 수많은 역할을 강요하였다. 어린 아이에게는 학생을, 졸업한 뒤에는 대학생이나 병사를, 성숙한 남녀에게는 가족을, 가정의 밖에서는 납세자와 신민-인민-이 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사회적 신분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외로운 단칸방 속에서 셜록 홈즈-라이트노벨-을 뒤적거릴 뿐이다.(64p) 그렇게 무신론자였던 국민들은 돈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였다. "돈은 신이 예전에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로지 실패와 성공만이 의미가 있다."(80p) 이제 국민들은 그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가진 재산을, 그가 가진 직업을, 그가 가진 명성만을 본다.
이 세상은 죽어가고 있다, 다시 태어나는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161p)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는 이는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좌절한다, 절망한다. 돈만을 숭상하는 현실을, 그리고 자신의 집안이 돈을 벌지 못하는 대가로 마지막 후손에게 주어지는 경멸을. 그렇게 열 여섯살의 소년은 수입과 재산이라는 물신만능주의를 추종하는 이 세상의 부당함을 깨닫고 "돈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물론 비밀리에."(82p). 그의 전쟁은 다른 사람들처럼 약자를 착취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만을 위한 전쟁이다. 잘못된 세상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정의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전쟁인 것이다. 그렇게 페르소나를 혐오하게 된 소년은 성장의 거부를 결심한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83p) 인간으로서 스물 아홉살까지 살아게 된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잘못된 집착 때문에 성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삼류 사립학교 출신으로 마음만 먹으면 수입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려 중산층으로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현대적 장사는 모조리 사기(79p)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년은 근대 문명은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기만과 모두가 형식상 평등하다는 위선 속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 중산층의 삶을 거부한 소년은 시인의 꿈을 꾼다. "그것은 가난과 외로움에 반격하는 방법이었다."(59p) 소년은 그렇게 무능하고 게으른 외톨이에게도 나름의 사명이 있으며 꿈꾸는 것이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스물아홉살 소년의 삶은 모순적이다. 돈 벌기를 싫어하면서도 돈 없이는 사랑도 없을 것이라는 명제(27p, 198p)를 추종하면서 살아간다. 사랑받고싶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는 강박을 가지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의 좁은 대인관계는 부유한 사회주의자와 상냥한 여성으로 한정되어있으며 그들을 만날 때 고백하는 자신의 내면은 적잖은 부분이 헛소리로 점철되어있다. 자신의 아픈 자아와 과거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말을 하면 할수록 그들과의 관계는 파탄난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그들을 만나지 않을 때에는 돈의 세계 밖에서 창조될(378p) 장편 대서사시를 끄적거리지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입증해주는 대상(112p)이 되기는 커녕 맞서 싸우는 악몽(58p)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늙은 소년은 마침내 자신이 어렴풋이 짐작해오던 비참한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일하던 헌책방에서 해고되고 하숙방에서도 쫓겨나면서 사회주의자의 집에서 빌붙게된다. 그러다 급여가 더 낮은 일자리를 억지로 부여잡게 된다. 그렇게 서른 살이 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30년을 살았지만 성취한 게 아무것도 없이, 발가락이 양말에서 삐죽 튀어나왔고,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곤 1실링 4펜스(약 7천원~1만원)밖에 없이 슬럼가 다락방의 누더기 침대에 누워 있는"(412p) 주인공.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곳이 자신이 있어야할 곳이라 생각하며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이 곳은 최소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고 (대신 죽음만이 있는) 이 빈민가에서 나름의 안식을 느끼게 된다.
2.
이제 시선을 그의 조력자인 사회주의자에게로 옮기자. 그는 주인공과 가장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사람이다. 상류층으로서 대학을 나왔고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지적, 감수성도 매우 풍부한 사람이지만 그와 동시에 역설적으로 주인공이 고민하는 이유를 그나마 이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의 방식에서 벗어나 조금 더 여유롭게 살기를 권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빈민가까지 찾아가면서 당신의 원칙이 전적으로 옳다고(396p) 위로해준다. 주인공은 그런 사회주의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당신은 원칙이라는게 실행에 옮기지 않는 한 모두 옳다고 생각하고 있소." (397p) 그리하여 사회주의자는 주인공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한평생 모든 것을 가지면서 살아온 그에게 사회주의는 결국 나름의 속죄책일뿐 진정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씁쓸하게 증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그의 여자친구다. 옛 직장동료이자 유능한 전문직인 그녀는 점차 두려워하고있다. 주인공이 페르소나에 대한 반역을 통해 성장을 거부한다면, 그녀는 성에 대한 미숙함(211p)과 세상에 대한 순진함(403p)을 통해서 여전히 소녀로 남는 그녀도 이제 곧 나이가 서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소년을 설득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오르고자 한다. 회사의 이사를 간신히 설득시켜 일자리를 만들어낸 소녀는 그에게 카피라이터로 돌아가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소년은 "당신은 날 연인이 아니라 남편으로 대하고 있소."(408p)이라고 말하며 다시금 그녀를 물리치고 만다. 소년은 자신의 미래를 확인하고 그 길을 향해 추락하기만을 바란다. 최소한 자신이 맨 처음에 꿈꾸었던 돈에 대한 반역만을 헛되이 부여잡기를 원하면서. '
답답해진 둘은 저 구제불능 피터팬을 어떻게 해야할지 토의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자는 또다시 주인공이 원칙으로는 옳다고 변호해준다. 소녀는 마침내 폭팔한다. "오, 원칙적으로! 우린 원칙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373p) 사실 둘은, 아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두는 이해하고 있다. 이 세상이 모순되었고 그런 모순을 외면하는 것이 성공의 제1원칙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은 소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공을 포기한 대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은 그렇게 가면을 쓰기를 거부하는 소년을 끝내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골방에 쳐박혀 땅 속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주인공을 구원하기 위하여. 소녀는 소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서른 살의 여인으로 살아가기를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소년은 자신이 만들어낸 '시'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병 속에 죽어있는 가혹한 태아'(157p). 하지만 소녀의 사랑을 통하여 가혹한 태아의 심장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태아가 살아 움직이면서 소년은 자신의 갈망을 되돌아보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픈 '비밀스러운 갈망'(450p). 마침내 그에 굴복한 소년은 다시 소시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영웅적인 희생도, 고귀한 결심도 아니었다. 차라리 겸손한 악당(450p)이 더 적합한 비유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제 서른 살의 청년은 더 이상 태어나지도 못한 채 병속에 쳐박혀있는 열 여섯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비록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지하철에 쳐박히고 직장에서 영혼을 철저하게 팔아치우고 탐욕스럽게 돈을 추구하겠지만, 그런 삶에도 가족을 위해서 나름의 품위를 지키면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자신들만의 규범(452p)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청년은 중산층의 승리를 선언(453p)하면서 투쟁을 끝내게 된다.
3.
주인공은 결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다. 키는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173cm에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나 있고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데(6p) 그런 그의 얼굴은 주변 사람의 평에 의하면 "(눈이) 빼내 삶아먹은 것처럼 퀭하게 보인단 말이야."(345p) 게다가 내면이 매력적인 인물도 아니다. 돈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의 그는 "일자리를 지킬려는 이들의 노예근성을 관찰하는 기록자"(96p)을 선택했고 시작한 후에는 "현대적 삶에 대한 증오, 다시 말해 폭탄을 터트려 우리의 물질문명을 지옥으로 날려 보내기를 바래는 욕구"(159p)를 지니면서 살아가고 있다. 헌데 지금도 그렇듯이 1930년대 영국에서 리얼리즘 소설은 주로 저소득층이 아니라 주로 직업적인 문학 전문인이나 중산층이 읽는 일종의 고급 취미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혼을 철저하게 팔아치우거나 최소한 생계에 대한 고민따위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만이 이런 책을 읽는다. 당연히 소설은 (몇번이고 언급하지만) 비참하게 망했고 10년 뒤 대박을 친 작가가 자비로 책을 회수할때에도 서점에는 이 책이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잘못되었다.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완벽하게! 그러나 어떤 이는 그런 이유로 인해 이 소설에 애착을 가진다. 작중에서 말했듯이 실행에 옮기지 않는 원칙은 모두 옳다, 뒤집어말하면 실행에 옮기는 원칙은 언제나 그릇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한 원칙을 실행에 옮길 수 있냐는 각오에 있다. 주인공은 자신만의 원칙을 위해 투쟁을 실제로 옮겼고 그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깨닫지 못했지만 주인공 또한 여자친구를 구원했다.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사는거예요'(102p)라는 철학을 가진 소녀는 그것을 실행하는 주인공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소녀의 말대로 "당신이 다른 사람이라면,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213p)라는 말대로 소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이끌려 2년 동안 소년의 투쟁-소녀의 시간이기도 했다.(403p)-을 기다리게 되어 마침내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를 구원했다. 익히 알려져있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와 실패를 지적당한 작가는 자신이 못생긴 인물이며 자신의 인생 앞에는 실패만이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30살 즈음까지 지니면서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작가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신체에 결점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쓸 무렵 자신을 후원해주는 사회주의자와 한평생을 같이 살게 될 반려자를 실제로 만난 작가는 점차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실제로 이 직후 저술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는 '60살까지 살거나 서른 권의 책을 쓰게 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미래에 대한 계획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 스스로가 성장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형편없이 망한 '병 속의 죽은 태아'은 10여년 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인 '유럽 최후의 인간'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일 것이다. 오히려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성장주의 소설의 모범에 가깝다. 화자의 주인공은 성숙했을지언정 성장하지 않았다. 그 예로 돈의 신에 굴종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여자친구에게 매달렸던 주인공은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이제는 굴종을 포기할 것을 두려워해 자본주의의 상징을 키워야한다고(463p) 칭얼거리고 있는 것에서도 보이듯이 적어도 그의 내면은 방향만 달라졌을뿐 여전히 절반쯤은 어린 아이에 가깝다.
4.
주인공은 소리없이 울부짖는다. 모든 것이 돈으로 돌아가는 이 거짓된 세상을 향해서. 주인공은 아무도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만의 상처을 부여잡은채 괴로워한다. 이 세상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가면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매개체만을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이 매달리는 대서사시 '런던의 환락London Pleasures'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떤 환락도 없이 바람부는 초가을 날씨 속에서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독백과 고통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투쟁은 무의미하고 초라하지만 영웅적이다. 그는 이 세상의 존재를 문학으로 투영시키고 그것을 완성시키기를 원한다. 즉 주인공은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는 비참함과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하기를 희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돈과 성공을 위한 역할-페르소나-가 아니라 그런 성공에서 소외된 인간들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가난에 절망하는 진짜 이유는 비극적이다. 자신이 시를 완성시키지 못함으로서 세속적 율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알고 싶어한다.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한) 관계-페르소나-가 없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사회주의자와 여자친구는 구원의 손길을 내밈으로서 답변을 대신한다. 직업이 무엇이든 사는 곳이 어디든 인간은 인간이라고. 그리고 아이를 가지게 된 주인공은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일부임을 깨닫는다.(441p) 그렇게 작디작은 태아을 통해 존재하지 않았던 태아(런던의 환락)을 교차시킨 주인공은 드디어 자신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죽음만이 가득한 1930년대 영국에 어린 아이가 태어난다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서 내일에 대한 기대를 걸어주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5.
어쩌면 주인공은 이 세상에 대한 진정성을 찾는 것을 거부하고 위선을 택함으로서 평범한 근대인의 삶에 동화된 것으로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의 살아감은 또 다른 '실천하는 원칙'에 속한다고 나는 믿는다. 주인공의 새로운 투쟁은 이 세상을 향한, 돈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랑하는 인물과 살기 위한 싸움이다. 그것은 씁쓸하고 무익한 일상의 반복이겠지만 최소한 그 나름의 성실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주인공의 또 다른 결단은 경외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원하는 진정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이 실존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헤겔과 도스토옙스키에서부터 서브컬쳐물 러브코미디극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 의문은 영원히 풀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젠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이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중산층이 되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것이다. 영원히.
글내려 내가 상금 받아야해
와 페르소나 아시는구나 정말 갓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