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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며, 자신의 힘으로 그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음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있는 무엇인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가까운 사례를 보자면 점치기, 사주 보기, MBTI 판별부터 시작해 과학적 관찰에 따라 개인의 기질, 신체적 특성, 성격 등이 정해져있다는 믿음까지 그 범위는 광범위 하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바꾸길 원한다. 그 운명을 자유자재로 제어하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은, 과학적 상상력과 이론에 근거한 타임워프라는 과학적 상상물의 개발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바꾸기를 원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시공간을 장악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타임워프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다.


일반적인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문학이나 영화들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정한 행동을 한다. 이상한 결과가 벌어진다. 뜨악하며 타임워프한다. 다시 다른 적절한 행동을 한다. 훌륭한 결과를 즐겁게 누린다.


그렇지만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의 타임워프는 일반적인 타임워프물과는 달리 결과에 대한 변수를 만들어 과거와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즉,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장점이 전혀 없다. 단지 타임워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들여다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바꾸지 못할 운명이라면 인간은 어두운 낯빛으로 미래의 불예측성이라는 늪에 발을 담구고 그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엔 없을까?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큰 욕망덩어리의 집합체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꿈과 이상은 설령 타인에게 비웃음당할지언정 꺾이진 않는다.


바뀌지 않는 과거와 미래라 할지라도 과거를 직시하고 반성하며 채찍질하고, 용서함으로써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숨>은 기압차에 따라 인간의 사고처리가 이루어지는 세계를 그린다. 하지만, 우주는 점차 균형을 찾아가고 생존의 필수요건인 기압차도 점차 균형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란 이미지, 그리고 더 나아가 멸종이란 이미지뿐이다. 그와 대비하여 우주 속 먼지 티끌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그 먼지 티끌만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존재의 신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드러낸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자유의지라는 것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많은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 과학적 토론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자유의지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보고 들으며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한다.


다만, 자유의지를 믿는지 여부에 관하여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솔깃한 설명은 개인의 기질에 따라 자유의지를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어떤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강력한 증거 앞에 어떤 사람들은 무동무언증을 겪고 무기력에 빠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설령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실제론 있는 것처럼, 내 자신의 선택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자유의지가 진정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으로 믿게끔 또는 믿지 않게끔 개인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의지의 존재여부에 대한 생각은 각 개인의 사고 속에서 유연하게 변형되거나 바뀌기는커녕 자신이 가진 기존의 생각을 더욱더 공고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미스터리한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미스터리의 열쇠를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유의지의 존재를 더욱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선 컴퓨터 내에서 가동되는 가상세계를 뛰어노는 아바타와 같은 모양새를 한 동물 또는 로봇 형태의 디지언트들은 학습하는 프로그래밍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존재들이다. 마치 아기처럼 인간에게 양육되며, 학습을 통해 지능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이루고 교류하며 살아간다. 특이점이 오는 것은 각 디지언트들이 자신의 쓸모를 찾아 고심하며, 자유를 원한다는 것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부모의 품을 벗어나고 싶어하며, 더 이상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와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유사하다. 인간과 소통가능하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다르고, 종이 다르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진 않지만, 이들도 인간 부모가 자녀를 대하듯 그리고 사회가 인간을 대하듯 동등한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살아있는 것으로 봐야할까? 이들에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고, 성별에 따른 성적인 기능을 부여하고, 인간과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해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너그러울 수 있으며, 어느 범위의 권리까지 인정해줄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득히 머나먼 일을 다루는 SF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장면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닥쳤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인간을 키우는 것은 무엇일까? 양육에 최적화된 알고리즘에 따라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을 기계적으로 제공하기만 하면 될까? 아니면 생존에 필요한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필요할까?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에서는 양육에 필수적인 행위만을 설계한 자동 보모가 아이를 키우지만, 심리사회적 왜소증을 겪게 되는 한 아이와 개발자 겸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에겐 생존에 필요한 이외의 요소인 사랑이 필요하다. 오히려 사랑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다. 양육에 최적의 효율을 위한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 것, 그리고 그 효율성을 입증할 수 없자 아이를 고아원에 내다버리는 등 하나의 인간을 자신의 이론 입증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한 인간에게 대단한 결례이자, 명백한 과학적 실패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인간의 모든 대화와 행동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것들을 불러들여와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되어 사용한다면 인간의 생활은 과연 발전할 수 있을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해당 도구들이 개발되어 인간의 과거를 정확하게 떠올려 사실관계를 바로 잡는 세계를 그린다.


인간의 기억은 연화되고 과거엔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사실들도 어느 시점에선 또는 어떤 태도에서 말미암아 뒤돌아보면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과거의 추를 흔쾌히 용서할 수 있는 시점이 도래할 수 있는데, 이 용서를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에 대해 망각하고 윤색하는 것이 조건이다.


하지만 모든 대화나 행동이 저장되고 원할때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를 위한 기본 전제조건을 상실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므로 사실적, 법적 분쟁이 해소될 수 있는가 하면 사실 전혀 해결될 것이 없다.


인간의 의사는 때론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정의나 대의 등의 덕목들에 의해 정해져야만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하지만, 문자를 사용하는 문화에선 집필된 무엇인가를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경향이 있다. 비록 그것 자체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분쟁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들이 상충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하지만, 과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장치들의 재생을 통해 해당 상황에 대한 해석의 오류, 사고의 오류, 판단의 오류가 도처에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발전은 절대적으로 내가 옳다라는 관점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결점 너머 새로운 사고가, 새로운 사회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침묵



<거대한 침묵>에서 인간은 우리와 비슷한 혹은 우리를 뛰어넘는 지능을 지닌 외계의 생명체를 갈구한다. 우리의 간절한 외침에 대해 우주는 침묵으로 응답한다.


하지만 그 침묵만이 감도는 우리 세계와 외계의 사이에는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우리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던 생명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과 유사한 구조와 인간 못지 않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들이 인간은 알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계의 생명을 갈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대단한 오만이 아닐까? 세계는 아직도 거대한 침묵 속에 싸여있다.




옴팔로스



신은 세계를 왜 창조했는가? 신은 일정한 의도와 목적 아래 우주라는 세계를, 그리고 인간이란 생명체를 만들어낸 것이 맞는가?


<옴팔로스>는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과 신의 뜻에 어긋나는 여러 과학적 반례들을 통해, 신에 대한 인간의 흔들리는 믿음을 드러낸다.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자연계가 어떠한 의도나 목적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뿐이라면, 세계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이 맞을까?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이 단지 신의 우연적 놀이에 따른 결과라거나, 절대적인 어떤 존재를 생성하기 위한 연습으로써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의 의도나 목적에서 벗어난다면 오히려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신의 계시에 따라 행동하여 의미와 보람을 얻고 신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던 것들에 대해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런 행동들을 하도록 신이 설계하고 만들어낸 게 아니라고 한다면, 신에게 돌리던 영광과 숭배의 몫은 오로지 인간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나의 선택을 통해 행위함으로써 보람과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깨달음을 얻는다. 굳이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거창한 세계관의 확장 없이도 스스로 구원받는 것이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하나의 선택을 하면 내가 하지 않은 다른 선택을 한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는 프리즘이라는 장치를 통해 내가 하지 않은 다른 선택을 한 평행세계속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상황을 그린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하지만 그 자유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 이 선택이 최선의 합리성을 가져다줄 것인가? 최선의 효율성을 안길 것인가? 만약, 내 선택보다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결과가 더 좋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들이 그것이다.


작중 인물들은 자유의 반대급부인 불안에 지독히도 시달린다. 불안의 유형은 다양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선택으로 잘살고 있는 평행세계의 나를 만났을 때 드는 질투, 비도덕적 선택을 통해 괴로워하며 평행세계의 나와 비교하는 강박, 또한 내가 하지 않았던 선택에 의한 또 다른 평행세계의 내가 실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인간의 선택의 신중함과 균형성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무기력함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분명,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만약 당신이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언제나 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지금 행동은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여부에 영향을 끼칠 거예요.”


냇은 약물에 중독되었던 지난 날의 삶들과, 약물과 같은 강렬한 자극을 잊지 못하고 사기에 가담하는 인물이지만, 현재의 올바른 선택이 자신을 만들어가리라고 서서히 믿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고, 비슷한 불안에 빠져있는 타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그 순간, 그녀의 자유 속 불안은 종식되고 고뇌의 결과와 순수한 침전물인 자유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