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집청소하면서 버렸던
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 생각난다.
어머니께서 처녀 시절에 사셨던 까만 양장본에 금박으로 제목을 새긴 100여권의 책들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그 까만 책들이 책이 아닌 줄 알았다. 아무도 꺼내지 않았기에 책장의 부속품인 줄 알았다.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내가 만질 수 없는 정체모를 비밀인 줄 알았다.
처음 그게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참 신기했다.
읽고 싶었던 세계 고전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두꺼운 책들은 못 읽고, '검은 고양이'와 '느릅나무 밑의 욕망'만 겨우 읽었다. '분노의 포도', '달려라 토끼', '벚꽃동산' 등 생소한 제목들을 훑어 넘기며, 어머니의 처녀 시절 이야기를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서도 한자 가득한 옛 번역이 어려워 도서관으로 새 번역을 보러가곤 했다.
몇년 전, 이사하면서 어머니는 그 책들을 전부 버렸다.
읽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책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도 나는 조금 아쉽긴 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 세상엔 글자 작고 빛바랜 책보다 세련된 책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책들이 생각났다. 이제 나는 한자도 제법 읽을 줄 알고 긴 책도 참을성 있게 읽을 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사셨을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읽는 것이야 언젠가 때가 올 때 읽으면 되었을 텐데, 왜 그 추억들을 빨리 버렸는지 모르겠다. 책이 책인 줄 몰랐던 때의 동심, 아이들에겐 흔치 않은 검은 양장본의 웅장함, 우리집이 도서관 못지 않았을 때의 자부심, 처음 보는 제목들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 그리고 엄마와의 친밀감. 그래서 오늘따라 120권 짜리 검은 양장본의 세계문학전집 앞에서 설렁설렁 책을 고르고 싶었다.
글 잘 쓰네
나도 가끔 엄마가 이사하면서 버린 책들 생각남. 내 앞에 무한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것 밖에 남지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