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512103&exception_mode=recommend&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A3.A8.EC.9D.B4&page=1



위에 글을 읽고 든 생각입니다.






1.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미치광이라는 논증을 편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고장 난 시계도 두 번은 들어맞는데 현대에 들어도 사랑과 교훈이 넘치는 위대한 스승을, 단순히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떤 의미로 말한 지도 확실히 모를 무신론자들에게 소개하며 진짜 신의 아들과 미치광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니...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이런 모 아니면 도 식의 논증은 우격다짐으로 느껴지며 논리의 비약, 혹은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시대에 그의 나라에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가 쓴 '순전한 기독교'는 BBC에서의 강의록을 엮어 책의 형태로 출판한 것입니다. 당연히 청중들은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귀들이었고 그는 어떤 지식적 수준에 대한 합의를 전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경험들로 인해 그는 몇 가지 단어들(이것도 추려서 말한 듯 합니다만)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신학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쓰이며 거기서 자라난 더 큰 오개념들이 자리잡고 있음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합의된 신학적 상식들에 대한 오해들을 발견한 것은 지식인들 중에도 있었고, 그들 중에는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이 뿌리부터 흔들려고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역사성'입니다. 사복음서의 역사성은 물론 예수의 알려진 가르침마저 아예 왜곡하여 치부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올바른 검증 방법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전제 자체를 일방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위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중 사복음서에 대한 불신과 스승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오해했다는 공격은 특히 치명적일 수 있는데, 그것은 사복음서가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과 근대 이전의, 그러니까 '오래전'에 있었던 기록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여러 계층의 다수의 사람들의 믿음이 결합하여 대단히 교묘하게 스며들 수 있는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2~3천년 전의 역사가 기록되었으면 얼마나 자세했겠느냐, 하고 막연히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도무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근본이 되는 '객관성'이 부족하게 들리는, 그의 '제자들'이 쓴(누가는 직계는 아니었습니다만) 4개나 되는 짧은 전기가 그 세월과 서로 간의 미묘한 차이를 이유로 고무 구부리듯 몇 가지 치우친 '대단히 합리적인 전제'에 희생되기는 쉬워 보입니다.



그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위 글의 댓글에도 나오듯이 도무지 예수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저 위대한 인간의 교사였으며 자의든 타의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부풀려지게 되었다는 시나리오는 사실 관계를 제공하지 않고도 당시 영국인들의 문화속에 녹아있던 기독교적인 배경과 반기독교적인 시대적 흐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던, 항상 엄하게 보였던 할아버지의 충고와 엄포가 이제는 믿고 싶지 않았던 터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 말들은 실제로 공연한 충고였으며 할아버지는 사실 너를 여전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대단히 친절한 분이기에 그 충고를 듣든 듣지 않든 유산은 너에게 돌아갈 거라고 속살거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할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도 청산하고 왠지 불안했던 엄포와도 맘 편이 이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먼저 텍스트에 대한 의심을 엄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제해야 하겠지만 저 강연에서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유연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차라리 신의 아들과 미치광이라는 이분법이 더 사리에 맞음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양자택일의 백신이었고 단순히 '그래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다'라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도 시인하다시피 믿음의 영역이며 다만 함정에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를 준 것입니다.







2. 변증의 영역과 독자의 영역


그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실질적인' 부분에서 거의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있다면, 저는 그가 학자이며 그의 양심 상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실질적인' 것은 이미 다루었습니다. 


기독교는 나무의 비유를 대단히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와 무수한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인류의 큰 진보를 불러올 수 있고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실로 다양한 맛의 열매들이 있지만 놀랍게도 그 씨앗은 단 한 종류입니다. 그것을 감싸는 달콤한 지식은 그 사람이 맺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가든 과학자든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고 대중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 책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이가 기독교인이라면 확고한 과학적 토대 위에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그 독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자기가 먹은 그 과육이 이제 보니 맛이 없다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 열매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면, 저는 거기서 나온 웬 맛도 없는 딱딱한 그 씨앗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신에 땅에 심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 키울 것입니다. 이제 딱딱한 씨앗에 대한 반감보다 그 열매를 나도 키워 맺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앞섭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 가끔 저항할 수 없이 글쓰기에 빠지는 일도 있으니까요.



변증은 싹을 트게 하거나 돌보는 것이지 그 대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나는 새싹은 그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열매는 과육속에 담긴 그 씨앗에서 자라납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성숙의 증거이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달콤하지만, 정작 씨앗과 새싹에게 필요한 것은 대지의 양분과 물, 그리고 하늘의 빛이라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어쩌면 추상적이기까지 한 자연의 양식입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나무는 단단한 거목이 됩니다. 새싹에게 열매를 주었다간 양분도 못되고 오히려 당분으로 인해 썩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작가가 자신이 이 책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과 그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기대하고 부탁하는 부분의 구분입니다.



이처럼 맛도 없는 변증은 사고의 체계를 자라게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감화되었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욕을 하면서도 사고의 체계가 좀 더 '벌어지게' 됩니다. 그곳은 눈을 돌리지 않으면 끝까지 공백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또 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백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이야말로 개인의 세계관의 공백이며 지적인 사람은 그런 공백을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칠해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달콤한 열매는 아니지만 이미 싹이 난 이들에게는 영양가가 풍부하며 변증서로서는(아직 씨앗이 심기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일 수 있지만 훗날 씨앗이 심겼을 때 질 좋고 촉촉한 토양의 기초가 되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의견들에 대해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 - 피고석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