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제목이 알려주듯 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정확히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세대 갈등,
더 정확히는 당시 농노 해방 등 사회 변혁으로 인한 러시아 내부의 갈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1861년 전후로, 사람들이 슬라브파-서구파로 구분지어졌던,
자본주의에 기반한 러시아 제국의 시작이자, 혁명의 씨앗이 되었다는 그 시기다.)
그러나 세대 갈등을 훌륭하게 그려낸 소설로 많이 읽히는 이 작품은
사실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 위한 소설도 아니고,
대립항을 세우고 서로 싸움 붙이기 위한 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두 세대의 현실을 양가적으로 그려내며,
그들이 처한 슬픔을 다소 '사실'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소설이다.
먼저 아버지 세대인 니콜라이와 파벨, 바실리는 대체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겪은 인물들이며,
당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굉장히 귀족적인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한적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 아버지 세대의 삶은 굉장히 생활적이고 현실적이다.
귀족 출신인 그들은 농노들의 일에 열심히 개입하며, 직접 땀 흘리는 부지런한 이들로 그려지지만,
잔인하게도 그런 이들에게 현실(사실은 아들 세대인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내린 평은 -퇴물-이다.
그들은 세월에 의해 사교에서도, 사상에서도, 정치에서도, 이미 내려와 현실에 안착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 매커니즘은 (우리네 부모님들이 으레 그렇듯) '아들 세대'를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두 세대는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서로 불가해한 존재로 그려지며,
그럼에도, 또는 그렇기에 아버지 세대들은 다소 맹목적으로 아들 세대를 존중하며 그들에게서 한발짝 물러나 있다.
반면 아들 세대의 경우엔 대놓고 '니힐리스트'라는 단어로 지칭되는데, 사실 여기 나오는 두 아들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작품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예브게니 바자로프는 마치 푸시킨이나 레르몬토프가 그려낸 젊은 귀족처럼
인생에서 맛볼 건 다 보고, 사교계 사람들을 한심해하고, 사랑이나 우정 같은 '낭만적인 것'은 모두 쓸모 없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바자로프의 심리는 조금 복잡한데, 이들이 보이는 '니힐리즘'의 태도는 그들의 현실과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중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내가 존재할 시간보다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 더 많은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렇게 말하는 바자로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쓸모없는' 사랑을 겪는데,
이 사랑을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이라면서 부정하면서도, 종래에는 사랑의 감정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바자로프의 복잡한 심리는 절대 다른 사람들에겐 보여지지 않는다.
또 그는 아버지 세대의 '삶'을 절대 배척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아버지 세대 말고도 그는 자신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태연하게 자신의 무심한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바자로프의 무심한 태도가 아이러니하고 슬픈 상황을 자아낸다.
또 다른 아들인 아르카지 키르사노프는 작품이 표방하는 진짜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팔딱팔딱 뛰고, 생기가 넘치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바자로프와 긴밀한 관계를 맺지만, 사실 그의 사상에 진심으로 감화되었다기보단,
묘사를 보면 젊은 사람 특유의 '친구 따라 강남 가기'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약간 근거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를 계승하듯 새로운 세대로서의 '삶'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이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세대간의 대립적 갈등이 아니다.
'아버지' 세대가 흔히 겪는 문화 차이와 생활과 현실, 그리고 자식 세대에 대한 '사랑'과 '불가해'
'아들' 세대의 방황과 실존, 허무, 그럼에도 있긴하는 '사랑'
전체적으로 프랑스 고전 소설스럽게 쓰여진 이 작품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들이 한데 얽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긋나고 맞물리는 과정은 '현실'을 초월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당신은 어느 쪽인가'를 묻지 않는다.
투르게네프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어떻게 알겠는가!' 라고.
사실에 던져진 인물들의 운명은 때론 현실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바자로프는 자꾸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소설을 보며 느끼게 된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존재하기까지의 시간보다 옛날에,
짧지만 슬프고 또 행복한 순간이 러시아 어딘가에 있었다고,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바로 거기 있었다고, 분명.
------------------------------------------------------------
뚜르게네프는 '서구적이다.'라고 많이 평가받던데
왠지 알 것 같은 소설이었음 ㅎ
뭔가 러시아 소설 맞나? 싶은 기분이 좀 듦
아니면 우리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너무 절여진 건지...
다음엔 첫사랑 읽어야지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