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75e48374b58060f636e8e9e458db343a783002b5d5da1a531d73


말 그대로 위태롭고도 애처러운 제목이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이 서울에서 활발히 발표되고 있던 때에, 저 멀리 떨어진 국경의 사람들에게 해방은 또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실제 작가 본인의 귀국 경험이 녹아 있던 이 소설은, 만주에서 함북  회령, 청진을 거쳐 서울로 돌아가는 여로형 소설이고, 그만큼 다양한 군상들을 만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작가의 분신인 '천복'의 친구 '방'이다. 그 어떤 감정이나 희로애락도 없이, 둘은 오직 귀국이란 목표로 기차에 오른다. 객차도 아니고, 무개화차에 올라 피난민 행렬에 뒤섞여 겨우겨우 도착했지만, 회령에서 잠깐 기차에서 내린 사이 천복은 친구를 놓치게 된다.

어째 트럭을 얻어 타긴 했어도, 거친 길은 여전하다. 무대는 이제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두 가지 다른 시선으로 진행된다. 회령에서 청진으로 가던 도중 주인공은 잠시 한 마을에 있는 개천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아직도 해방이라는 커다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고국의 사람들을 만나 더욱 심화된다.

먼저 한 소년을 만난다. 이 소년은 그전까지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반일 감정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방 후 하루아침에 수탈자로 낙인찍힌 일본인들을 고발하고, 지역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인물이다.

발걸음을 다시 옮겨 만난 또 하나의 사람은, 청진역 주변에서 국밥을 팔고 있는 노파이다. 이 여인은 일제시절 아들을 잃었지만 앞서 말한 소년과 다르게도, 피지배자로 전락한 일본인들의 신세에 공감을 표하고, 더 나아가 아들의 동지였던 일본인 청년을 회고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주인공은 위의 두 인물상을 확인하고, 일본인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을 함께 느끼는 기회를 갖게 된다. 어찌 보면 주인공은 그 누구보다도 회색인적 인물이다. 반일적 소년과, 일본인에 대한 공감을 표하는 할머니를 바라보면서도 자신은 그 어떤 의견도 표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해방이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자신의 귀로를 우선시하며, 해방에 대한 특정한 감정 없이 그저 자신앞에 주어진 현실만을 덤덤히 기술하기 때문이다.

증오와 연민, 기쁨과 허탈감, 해방과 패망. 두 양극단이 배타적으로 공존하던 시기에, 그는 그저 자신의 살 길과 현실을 먼저 마주할 뿐이다. 조선인인 자신이 마주한 조선의 현실에서 느끼던 괴리감과 위화감, 그리고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귀국 과정에서 겪은 혼란과 당혹감을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혹하게 풀어나가고 있던 것이다.

다행히도 소설 마무리에서, 주인공은 친구 '방'과 다시 해후하고, 청진에서 서울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다시 떠난다. 여기서도 우리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여 교통을 통제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일제강점기라는 모순의 시대에서, 해방정국이라는 또 다른 단계의 모순과 혼란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주인공은 소년보다는, 국밥집 노파에게 더 공감한 듯하다. 달리는 기차에서 허공에다 대고, 모자를 흔들며 그 모습을 잊지 못한 채 잔잔히 끝나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하게 나오거나, 자칫 일면적으로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닌, 보다 색다른 차원의, 제3자화를 통한 새로운 주관에 도달한다. 가장 뜨거웠던 시기에, 가장 차갑게 살아간 사람이었다.

이 소설의 장점은, 주어진 외부 세계를 단순히 일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외부의 현실과 인물상과 접촉하고 보다 객관적인 자신만의 시선을 견지하면서 일관성 있는 주관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해방된 조국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대한 해답과 관점을 찾아나가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 백석의 친우였으며, 백석이 직접 그의 이름을 딴 시까지 써 준 허준. 그는 서울에서도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하다 결국은 소설에서 나온 경로를 거꾸로 하게 된다. 그도 잊혔고, 우리도 수십 년 동안 잊고 있었다. 그 위태롭던 잔등은 결국 깨어져, 한반도를 집어삼킨 거대한 화마가 되어 지금까지도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이제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만의 소신을 가지고 현실을 해부하고자 한 허준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길 바란다.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