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3 년 반쯤 전인 1949 년 여름 이전부터 구사카 요코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탄생은 우연히, 무의식중에, 그러면서도 엄숙하게 행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름은 나의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서 붙여졌으며 탄생을 강요한 것이다. 이 이름을 원고지의 한쪽 구석에 적었을 때는 나 한 사람만 인식할 수 있는 이름이었으니 틀림없이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인식하지 못하면 그 물체의 존재 가치 따위, 제로인 셈이다.
그때 비가 내리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여학교 때의 친구를 따라서 롯코에 있는 시마오 도시오 씨의 집을 방문했다. 그 이전부터 나는 소설을 쓰기도 하고 시를 노트 한구석에 연필로 끄적거리기도 했기에 문학 비슷한 것에 대한 움직임은 주위사람들로 어렴풋이나마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버지가 단가를 즐기셨던 영향으로 도이즈 라는 호를 받아 단가 모임에 참석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약 6개월 정도 뿐이고 스스로 단가 짓기를 그만두어 버렸다. 그 후, 본명으로 시를 투고하여 그 중 하나는 <백세>에, 또 다른 하나는 <문장클럽>에, 이렇게 하나씩은 반드시 채택되어 서점의 한구석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자는 폐간되었으며 후자는 한심해져서, 쓴 시를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쌓아두던 시절이 3개월쯤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를 가엾게 생각한 것인지 시마오 씨에게 이런 여자가 있다고 말한 듯했으며, 그렇다면 바이킹(VIKING)에 오라고 했기에 나는 시마오 도시오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VIKING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채 30매 정도의 소설을 들고 롯코로 간 것이다. 이 소설은 안되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처음으로 구사카 요코라는 이름으로 쓴 작품이었으며, 일주일쯤 뒤에 두 번째 작품인 「장마」를 시마오 씨에게 들고 갔고 그것이 VIKING에 실렸다.
시마오 씨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옆의 침대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던 아기만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귀엽네요, 하는 정도의 말만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두 번째 방문은 나 혼자였기에 그와의 대면은 더욱 어색했으며 툇마루의 의자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무릎 위의 너덜너덜한 핸드백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쯤이나 쿵 하고 떨어뜨렸다.
8월의 마지막 일료일. 나는 그와 함께 VIKING의 모임에 참석했다. 한큐를 타고 다카쓰키(오사카와 교토 중간에 위치한 도시)의 절까지 가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듯 했다. 전차 안, 그는 무명으로 된 보자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었다. 나는 붉은색과 감색이 섞인 그 보자기가 선생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넓고 휑뎅그렁한 절의 방에서 나는 소주라는 것을 처음으로 마셨다. 그리고 구사카 요코라고 소개를 해주었을 때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랬기에 나는 담배를 마구 피워댔다. 커다란 목소리로 떠느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면서, 이 사람들이 바로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소설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였다. 당시 나는 18세였다. 모임은 끝날 듯하면서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내 무릎 위에서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후지 마사하루 씨의 조그만 머리였다. 나는 공포심에 가슴속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젠체하는 성격 때문에 평삼심을 가장하고 있었다. 농담 한마디쯤 했을지도 모른다. 2차로 역 근처에서 맥주를 마셨다ㅑ. 내 옆에 쇼노 준조 씨가 앉았다. 그는 나에게 명함을 가만히 건네주며 편지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명함을 달라고 말했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명함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은 매우 기쁜 발견이었다. (그랬기에 이튿날 나는 구사카 요코의 명함 인쇄를 부탁하기 위해 외출했다.)
막차를 타고 고베로 돌아왔다. 기시모토 미치오 씨가 바래다주었다.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설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완성한 작품은 시마오 씨에게로 가지고 갔다.
<장마>가 실렸다. 그 모임은 오사카 대학의 한 교실에서 행해졌다. 여러 가지 비평을 받았다.
“이 아이는 내후년, 아쿠다가와상 후보에 오를 거야.”
후지 마사하루 씨가 중얼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쿠타가와상 후보는 10년쯤 쓰지 않으면 오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틀림없이 기뻤다. 그 후, 나는 매 호 소설을 발표했다. 그해말 나는 처음으로 구사카 요코 씨를 찾는 신문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나에 대한 기사를 싣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로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기획이 그림이나 무용이나 피아노를 하고 있는 영애의 이야기라는 테마였기 때문으로 나는 그 가운데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여 짤깍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마>이후 네 번째 작품이 <몰락해가는 세계>라는 70매짜리 소설이었다. 이것은 VIKIMNG에 실리기 전에 시마오 씨의 소개로 와카스기 게이 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좀 보여 달라며 가져갔다. 12월 이었는지 1월이었는지 어쨌든 추운 날에 나는 와카스기 씨의 집을 방문했다. 그의 눈은 뱀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VIKING 족들이 훨씬 더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와카스기 씨는 <몰락해가는 세계>를 고쳐 쓰라고, 그리고 문예 수도로 보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옮겨 쓴 뒤 도쿄로 보냈으나 안되겠다는 말과 함께 되돌아온 것이 2월 말. 그것을 그대로 V지에 실었다. 그 작품이 우연히 사쿠힌샤의 야기오카 씨의 눈에 들어 5월 말에 전보가 왔다. <샤쿠힌> 봄여름 호에 게재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잘 부탁하겠다고 전보를 쳤다. 그것이 <도미노의 알림>이라는 제목으로 <사쿠힌>에 발표된 것은 7월 초였다. 솔직히 말해서 V지에 발표되는 것과 인쇄 문자로 발표되는 것, 특별히 구별된 새로운 감각은 없었다. 그러나 원고료가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적어도 어엿한 소설가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미코치와 노리쿠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마에다 스미노리 씨로부터 <도미노의 알림>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에 뽑혔다는 속달을 받았다. 깜짝 놀랐다. <장마> 이후 1년이 되었을까 말까 한 시기였다. 게다가 네 번째 작품이었다. 기쁨보다 큰일이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별 생각 없이 써왔을 뿐으로, 쓴다는 것에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내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말도, 용기도 물론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선외 발표를 신문에서 보았다. 왠지 마음이 놓였다. 입선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도미노의 알림>을 나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예춘추>에서 니와 씨의 ‘처칠회의 여배우의 그림’이라는 비평을 발견한 순간에는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피부만으로, 표면만으로 작품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쓰지 씨의 <이방인>을 읽어보고 내 작품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느꼈다.
<구사카 요코의 탄생과 사망> 중에서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소설가. 본명은 가와사키 스미코. 고베가와사키 재벌을 일으킨 가와사키 쇼조의 증손녀. 고베 시 출생. 소아이 여자전문학교 음악부 중퇴. 시마오 도시오의 소개로 VIKING잡지에 참가했으며 후지 마사하루의 지도를 받았다. <장마>, <도미노의 알림>, <잿빛 기억>, <화려한 순간>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도미노의 알림>이 1950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4번의 자살 미수. <몇 번인가의 최후>를 완성한 뒤 1952년 12월 31일 한큐 롯코 역에서 철도로 뛰어들어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