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카 요코의 탄생과 사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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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내게 어떤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사쿠힌샤에서 원고료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집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반대하던 출발이었기에 나는 더욱 분했다. 가족들에게 대해서만은 보란 듯한 얼굴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팔릴 것이라는 전망도, 출판사로부터의 의뢰도 없었으나 참으로 부지런히 글을 썼다. <잿빛기억>에 착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두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과는 종종 말다툼을 했다. ‘웬만한 재능 가지고 소설가가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여 여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도 오기가 생겼다.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끝까지 해내겠다고 단언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는 그 후 신문 관계자로부터 기사와 사진을 싣겠다는 말을 흔쾌히 승낙했다.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해 12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고료 500 엔을 받았다. 고베 신문에 콩트를 실은 것이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족에게 줄 과자를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그 무렵 나는 찻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일을 도와주러 다니고 있었다. 하루 일을 하면 300 엔을 받았다.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잉크병과 원고지를 들고 CIE 도서관으로 갔다. 스토브가 있어서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1시간에 10장 정도의 스피드로 마구 써내려갔다. 나는 어째서 쓰는 건지 거의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가족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여류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그녀들이 묘사하는 여자에게 강한 반발심을 품고 있었기에 내가 쓰는 것은 대부분이 여자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여러 각도에서 여자를 해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잿빛 기억>도 내가 그때까지 밟아온 여정을 충실하게 글로 표현하겠다는 생각보다, 한 여성이 유년기와 소녀기를 거쳐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묘사해 보겠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후지 씨로부터는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V회에서는 작문교실이라는 야단을 맞았다. 나는 도미노보다 이 작품에 훨씬 더 애착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수정은 하지 않았다. <잿빛 기억>은 그 후, 이노우에 야스시 씨가 꼭 읽어보고 싶다고 하기에 깨끗하게 써서 도쿄로 보냈다. 그는 뛰어난 작품이라며 <문학계>에 추천을 해주었다. 그러나 채택되지 않았다. 나는 잿빛을 써서 발표한 뒤, 기교에 대한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자신에게 굉장히 화가 나서 VIKING을 탈퇴해버렸다. 그 전에 시마오, 쇼노, 마에다 씨도 전부 탈퇴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탈퇴한 이유는 내 감정의 물결에 의한 것이지 V지가 성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후지 씨와 악수를 하고 시민 교실에서 나와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심하게 울었다. 고독 속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하자고 비통한 결심을 하기는 했으나, 순간 V회 탈퇴를 후회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동안은 나의 공백시대였다. 나는 월 6천엔을 받기로 하고 클럽화장품 광고부 촉탁사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월 7천엔을 받기로 하고 NJB의 촉탁사원이 되었다. 나는 분주한 생활을 시작했다. 전자의 일은 거짓말을 얼마나 잘 사실처럼 보이게 하느냐 하는 것으로 화장품을 무조건 찬미하고 그 화장품을 쓰면 당신은 클레오파트라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단한 문구로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6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단 하나도 일을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어 번 책상머리에 앉아 외국 잡지를 뒤적이다 1시간쯤 지나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월급을 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처음에는 보험 외판원과 같은 일을 했다. 방송을 부탁한다고 디자이너나 미용사에게 청했다. 그녀들은 놀랄 정도로 고급 옷을 입고 있었지만 놀랄 정도로 하등한 인간들이었다. 다나카 치요 여사만은 달랐다. 대단한 걸물이라며 나는 머리를 숙였다. 하나도 재미없고 그저 허둥지둥하기만 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1개월 만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일을 바꾸게 되었는데 그것 또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유명한 소설을 낭독용으로 각색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일생을 반생으로 만들어버리고, 루딘을 청취용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받은 일은 겐지모노가타리를 15분 만에 이야기하게 하는 모험이었다. 여성교양문고의 낭독은 방송 이후 6개월 정도 나의 일이었다. 내일까지, 혹은 모레까지, 라는 주문을 받으면 집으로 돌아와서 밤새 작업하며 15분 분량씩 내용을 끊어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의 소설은 제발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외에 어린이용 동화극을 몇 편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개작하기를 싫어하는 나는 전부 내가 직접 창작했다. 연출도 했다. 라디오란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고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나의 재능은 라디오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곧 구사카에게 동화극은 불가능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듯했다. 나도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그만두려 했다. 첫 번째 원인은 소설을 더욱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쓴 두 편 정도의 작품은 지금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후지 씨에게 들고 갔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라며 야단을 맞았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라디오와의 연을 끊으라고 조용히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마침 클럽에서 쫓겨난 나는 수입이라는 문제 때문에 역시 NJB에 들러붙어 있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평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연애에 빠져 있었다. 라디오와 관계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소설도 쓰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서 NJB에 다녔다. 그리고 그와의 밀회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에 관한 것도 일에 관한 것도 전부, 내 스스로에게 생각하지 말라고 억지로 강요한 것이었다. 틀림없이 나는 커다란 오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애는 엉뚱한 결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나만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신 일보라는 신문이 생겨서 첫 번째 연재소설을 부탁받았다. 1회 1000엔의 계약으로 그해 안에 20회분을 건네주었다. 1월 4일부터 우쿠무라 하야토 씨의 삽화로 <언덕길>은 발표되어 나갔다. 복잡한 감정과 생활로 보내고 있었기에 참으로 거칠고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어쨌든 창작물이, 비록 지방의 촌스러운 신문이라 할지라도, 발표되ㅐ어 나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신문이 4회의 내 소설이 끝난 순간 폐간되어 고료를 2만 엔이나 받지 못하고 말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재촉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연애의 파국과 함께 규슈의 벽지로 여행을 갔었다. 2월 초순의 일이었다. 전년도 가을에는 도쿄와 하코네로 놀러 갔었고, 1월에는 시라하마와 류진에 갔었는데 그때의 상쾌한 기분과는 달리 답답함과 괴로움으로 가득해서 서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나는 일도 연애도 내팽개치고 시골 소학교의 선생이라도 되려고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여학교의 선생에게 잔소리를 듣고 규슈를 여기저기 방랑하는 동안 도회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다시 훌쩍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기에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소생했다. 그 결과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폐병으로 6개월 요양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늑막을 앓아 2주일 동안 절대 안정, 1개월 동안의 안정을 강요 받았다. 그러나 나는 담배를 피웠으며 책을 읽었고 펜을 들었다. <화려한 순간>은 이불 위에서 쓴 작품이다. 가래를 뱉는 항아리는 옆에, 체온계를 머리맡에, 그리고 세 사간마다 열을 재면서 굉장한 속도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쓰기 전에 나는 보부아르의 <초대받은 여자>를 읽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소설이 내 창작 방향을 잡게 해준 것 처럼도 여겨졌다. 하나의 존재 가치는 다른 존재에 의해 비로소 인정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화려한 순간>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반된 감정의 움직임을 다루어보려 했다. 150매짜리 원고를 나는 바로 후지 씨에게 보냈다. 그 답장은 참으로 호된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좌절하지 않고 개작을 해보았다. 그것이 VILLON 제 1호에 게재되었다. 그 후 나는 정신없이 글을 썼다. 그리고 VIKING에도 복귀하여 예전의 원고들을 정리해서는 발표해 나갔다. 200매 가까이 되는 소설을 새로 쓰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병은 전부 나아버렸다. 마침 5월 쯤에 쓴 희곡이 계기가 되어 고베에 연극연구소라는 것이 탄생했으며, 나는 특별히 이렇다 할 흥미도 없었으나 어영부영 관계하게 되너 회복된 순간부터 분주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상태가 되었다. 병을 앓던 중에 작곡을 결심하고 거기에도 열을 올리려 했으나 원래부터 끈기가 없는 나는, 하모니라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여 작곡을 단념해버렸다. 구사카 요코는 병 이후, 미미하게 활약했다. 갑자기 시 낭독회라는 것을 시작했고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1개월 동안은 정신없이 전념했다. 다시 VILLON의 <화려한 순간>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틀림없이 그 소설이 구사카 요코를 사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비평 때문에 소설 쓰기를 단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커다란 고민을 해가며 이 작품을 써내려갔다는 사실이 한심해진 것이었다. 틀림없이 하얀 원고지를 대할 때면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짧은 글을 단숨에, 그 충도의 인력으로 써내려가는 적도 있기는 했다. 지금까지 나의 많은 작품들이 그런 상태에서 태어났다. 안산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순간>은 굉장한 난산이었다. 난산 끝에 태어난 것은 커다란 결점을 가진 작품이었다.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해가면서까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이제는 고집 그만 부리기로 하자. 나는 이 길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듯하다. 아무리 고심해서 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이 엉망이라면, 그 고심은 쓸모없는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고심작이네 역작이네 하는 것은 어쩌면 모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오기는, 화려한을 발표한 후에 받은 충격 때문에 글쓰기를 바로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래서 <잉태>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두어 줄. 더 이상은 쓸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두어 줄이 되풀이되었다. 지금까지 쓰기 시작한 원고를 중간에 포기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나였다. 그런데도 쓸 수가 없었다. 어째서 고심을 해가면서까지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냐고 머리가 손에게 의문을 던진 것이었다. 그것이 5일 동안 계속 되었다. 나는 결심했다. 구사카 요코를 매장하자. 나는 조그만 나무상자를 만들어 하얀 천을 깔고, 물론 그 안에 구사카 요코라는 이름이 적힌 모든 종잇조각을 넣을 생각이다. 그리고 불태우자. 향을 바치자. 브람스의 4번을 틀고 두 번 다시 소생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구사카 요코는 3년 반 동안의 생명이었다. 구사카 요코의 존재 덕분에 얻은 것은,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시사회 초대권을 받은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은, 득이었던 것 같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구사카 요코의 사망을 통보하고 그 다음에 장례식을 치를 생각이다. 조문을 써야지.
너는 정말 멍청한 녀석이야, 라고.
(1952년 11월)
그러니까 변호사랑 결혼했어야지
아빠말 듣고 진즉에 결혼테크 탔으면 그냥 행복하게 잘살았을듯
100퍼지 아무리 몰락 재벌 가 후손이라지만 정재계입맥 생각하면 30년뒤에 총리부인 돼서 출판 좆되로하고있었을듯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