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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지하철역을 빠져나가고 있는 어느 날, 여고생쟝으로 추측되는 두 여성의 대화를 무심코 엿듣게 되었다. 



“아니 안 받는 새끼들은 왜 안받는거야? 이런 거 하나 안받아 주는 새끼들이 진짜 사회악이야!! 저런 새끼들 때문에 사회 발전이 없는 거라고!!”



“에이, ㅋㅋ 그 정돈 아니다.”



역 입구 앞에는 할머니라 불러야할지 아줌마라 불러야할지 판단이 어려운 애매한 분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곤 하는데, 아마 여고생쟝들은 전단지에 무관심한 시민들에 관하여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음이라 추측해볼 수 있었다. 나는 운좋게도 전단지를 들고 있었기에, 한 여고생쟝이 나를 보고는 세 명이 나란히 가기 비좁은 길을 먼저 가라고 터주었다. 이것도 내가 전단지를 들고 있었기에 베풀어주는 그녀의 도덕적 평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뚫린 길을 가면서 그녀는 도덕의 어느 계파를 따르고 있는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의무론자일까, 결과주의자일까, 공리주의자일까 아니면 미덕옹호자일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과격주의자인 듯 했다. 하지만 이런 분류가 도대체 무엇이 중요할까? 그녀는 친구의 만류에도 자신만의 완고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해보였다. 




***


인간은 이렇듯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지닌 도덕적 평가 기준을 토대로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판단은 조너선 프랜즌의 <크로스로드>에서 가장 주요한 인간의 특성이다. 주요 인물들은 자기 자신이 가진 도덕적 잣대로 타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더불어, 자기 자신만의 형벌을 선고한다. 



<크로스로드>는 작품 내에서 주된 소재인 교회 청소년부 단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어학사전에 검색해본 결과 이런 정의가 달려있다. 1. 교차로, 2. 행동 선택의 기로, 3. 암페타민 알약... 검색해보고 나서 검색하기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은 크로스로드라는 제목이 잘 어울렸다. 



왜냐하면, 잠재되어 있는 성욕으로 가득찬 호색한 아빠 러스, 과거에 불륜을 저지른 부정한 엄마 매리언, 무신론자 장남 클렘, 클렘에 좌지우지되지만 내부의 영성을 깨닫게 되는 베키, 암페타민으로 무너지는 약쟁이 삼남 페리,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각자의 인생이 얽힌 교차로에서 다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갈림길에 들어서서 스스로 자기 자신만의 선택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걸었던 길을 나의 길이 아니라고 ☓표 치고 영영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는 것을 크로스로드라는 단어에 잘 축약했기 때문이다. 



교차로에서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길을 위해, 자신에 대한 외부 영향력들에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한다. 엄격한 자급자족 공동체의 메노파 부모의 영향에서 결혼을 통해 벗어나려는 러스, 대공황 시기 아버지의 자살에 따른 충격과 편애로 인한 차별로부터 벗어나려는 매리언, 크로스로드에서 빌어먹을 성욕 때문에 아빠 러스가 비판당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클렘, 자신에게 부당하게 과한 영향을 끼치는 클렘에게 벗어나려는 베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영혼 존재의 문제, 선의 문제, 신의 문제 등과 같이 세계에서 자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고뇌하는 영혼인 페리가 모두 그렇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 소설에 왜 신이 결부되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스는 왜 하필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이며, 매리언은 특별히 교리를 따르지도 않으면서도 왜 독실한 신자로 설정되어 있으며, 클렘은 왜 무신론자이며, 베키는 대마를 피는 비행을 저지른 후에 신의 영성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 정서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프랜즌은 의문해결에 실마리가 될만한 힌트를 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셋째 페리가 약에 취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함과 더불어 ‘판단’하는 권위를 지닌 절대적 존재이다. 크로스로드의 인물들은 다른 사람에게 도덕적 선고를 내리며, 그럼으로써 신과 동등한 위치를 점한다. 



러스는 과거에 부정한 여자였던 매리언을, 매리언은 자신을 매몰차게 차버린 유부남 브래들리를, 클렘은 이중인격자 러스를, 베키는 자신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클렘을 규탄하고, 페리는 외관상 선한 행위에 치밀하게 계산된 이익이란 점에서, 선에 이유가 있다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규탄한다.



하지만, 이들은 판단행위에 있어 신의 위치를 점했을 뿐, 전지전능한 신의 판단과 달리 그 판결의 절대적 옳음을 획득하진 못한다.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정확한 사실관계와 판단 근거와 기준이 정립되어야 하지만, 모두 사실과 행위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자신만의 관찰 또는 생각, 근거를 토대로 상대의 행위, 기분, 의도 등을 추측하여 오류와 불완전함을 지닌 채 상대의 도덕적 흠결을 선고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술자가 각 인물을 다룬 장을 서술할 때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들이 서로 얽힌 것이 각 인물들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굉장히 탁월한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각자 이렇듯 불완전성을 가진 채 타인을 평가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지만, 스스로 도덕적 결함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신은 선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드러앉은 악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러스는 금발미녀 과부 프랜시스와의 (클렘의 표현을 빌리자면) 떡치기를, 매리언은 지난 불륜상대였던 브래들리와의 재회를 통한 질펀한 하루를, 클렘은 자신을 사랑한 섀년을 단지 사랑없는 성욕도구로 전락시키고, 베키는 애인있는 남자에 대한 사랑을 꿈꾸며, 페리는 약물을 끊지 못하고 더욱 중독됨으로써 각자 도덕과 욕망의 갈림길에서 욕망의 길을 따르면서 도덕적 타락을 자초한다.



이들은 도덕을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적 규범으로 여기기보단,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합리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스는 모든지 그보다 앞서가는 매리언이라는 존재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녀를 부정한 과거를 지닌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는 도덕적 선고를 내리며, 매리언은 러스와의 불만족스러운 관계를 탓하며 옛 상대인 브래들리를 떠올린다. 큰아들 클렘 역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상대 섀넌에 비해 뒤처지는 자신의 학업, 시간관리 능력에 대한 열등감을 직시하지 못하고, 화살을 아빠 러스에게 돌리며 입으로만 불우한 자를 위하라는 러스와 달리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자기 자신도 그 이웃들과 함께하겠다고 밝힌다. 



그들은 자신 내면 속의 악이 실현됨으로써 불우한 결과를 맞이하며 자신들의 죄를 절대자로부터 심판당하듯 죄를 선고받는다. 하지만 심판의 결과 진정 자신들의 잘못을 속죄함으로써 그들은 나름대로의 구원을 얻는다. 



러스와 매리언은 페리가 자살소동을 벌이는 동안 오로지 자신들의 쾌락만을 위해 각자 프랜시스, 브래들리와 신체적, 정신적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속에 속죄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행한 부당한 과거에 대해 용서한다. 베키는 태너의 전 여친 로라에게 따귀를 맞는 와중에 반대 뺨마저 내밀며 용서를 묵인받는다. 클렘은 사실상 종전 이후 군복무가 거부되어 해외에서 육체노동 중 불운한 가족들에 대한 동정과 자기연민이 피어남으로써 아버지를 과도하게 비난했던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가족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 베키를 방문함으로써 소설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기엔 뒷맛이 썩 개운치 않다. 왜냐면 페리가 사고치는 바람에 베키는 자신의 이모 셜리가 남긴 막대한 자기 몫의 유산을 모두 잃었고, 러스와 매리언이 페리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클렘의 자신에 대한 영향력 행사 시험을 똑같이 클렘에 대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하는 모양새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오? 역시 인간의 실수는 반복되는구나. 



***



횡단보도에 여고생쟝의 말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정 부분은 진리가 담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 부분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전단지를 받는 행위가 전단지 나눠주는 사람의 퇴근시간을 약간이나마 단축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선 이로운 행위지만, 동시에 전단지를 받게 되면 필요없는 전단지를 버리는 행위를 감수하는 불편이 공존한다. 내가 쓸모없는 전단지를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직접적 이익은 없지만 쓰레기 처리라는 귀찮음이란 손해를 안겨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합리성의 기준에서 판단해본다면 받는 것은 오히려 쓰레기를 늘리는 귀찮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단지를 받는 행위는 꽤나 멋있고 힙한데, 자기희생적이면서도 그녀의 퇴근을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남을 위하는 자기희생적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것을 꽤나 고귀한 행위라 여겼다. 아마, 그 여고생쟝도 비슷한 논리를 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더 나아가 여고생쟝은 전단지 받는 행위와 같은 작은 관심이 모이고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밝고 희망적인 이상 사회를 꿈꾼다는 점에선 어쩌면 작은 관심이 인류 사회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진리지만,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인 인간 본성에 따라서도 인류는 발전해왔다는 과거 역사에 비추어본다면 정당하지 못한 논리였기 때문이다. 



단지 추측일 뿐인 그 논리를 상상하면서 도대체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나는 도덕적으로 꽤나 고결하고 쿨한 존재라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사이, 횡단보도의 빨간불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약속에 따라 나는 길은 건니기 시작했고, 급하게 우회전하는 차량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내 눈 바로 앞에서 멈춘다. 갑자기 분개한 나는 쌍욕을 날린다. 



“아 시발새끼가 운전 개좆같이 하네.”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지닌 도덕적 잣대를 통해 검으로 짚단을 베듯 타인을 자르고 베어 남은 단면만을 보고 타인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며, 자기 자신이 지닌 도덕적 미덕이 타인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지니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 역시 도덕적 과오를 범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서나 발견하던 후진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그 순간이 오면 그저 모순된 존재라는 괴로움, 도덕을 어겼다는 죄책감 속에 인간은 고통 속으로 그리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추락하고야 만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다. 인간 내부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결투를 펼치는 결투장이자, 때로는 선이 이기지만 때로는 악이 지배하기도 하며 외형적으로 뚜렷하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악의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도덕적으로 완성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원천적으로 교육과 수행을 통해 악을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걸릴까? 악의 세계를 인정해야만 한다면 분명히 악은 불쑥불쑥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올 것이기에, 인간은 자신이 악을 저지르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그 고통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위안을 얻어야 할까? 이런 질문들 따위에 어떠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다만, 우리의 불완전이란 공통된 교차로에서 타인의 도덕성을 재단하는 섣부른 판단 대신 우리의 불완전성을 해소하기 위하여 상대에 대한 이해의 길로, 상대방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절대선이란 착각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우리를 동일시함으로써 타인의 용서할 수 있는 사소한 악들에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에게 내재된 악이 발현됐다면? 그저 자기 자신을 지독한 죄책감의 지옥에서 묵묵히 견디는 수 밖에. 그저 괴로움을 견디며 뼈저린 자기 반성을 하는 수 밖에. 자기 반성을 원동력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오로지 어제보다 나은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크로스로드>와 같은 작품에서 던지는 도덕적 의문들을 통해 내 안의 선악과 관련한 품성을 자르고 다듬고 삭삭 갈아 예리하게 날을 세워봄으로써 내 안의 미완성된 도덕의 품격은 과연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현대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에 독갤에 추천따봉을 날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