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서적 <강자의 조건> 에서 발췌함
펠리페와 빌럼
1555년 10월 25일. 브뤼셀에서는 반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한 황제의 퇴위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를 5세(카를 5세 혹은 카를로스 1세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는 그가 다스린 합스부르크 제국의 복잡성 때문에 약간 어려운 문제이다.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온전히 스페인 국왕이라는 느낌이 강한 반면 카를 5세(혹은 카를로스 1세)는 현재 독일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는 네덜란드가 무대의 중심이므로 카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앞서 스페인 식으로는 카를로스 1세라고 불린 사람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을 위해 유럽 전역을 돌며 전쟁에 몰두했던 그도, 이젠 지팡이에 기댄 노인에 불과했다. 카를 5세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신하였던 22살의 젊은이 오라녜공(빌럼 가문인 오라녜가는 독립 이후 네덜란드의 새로운 왕실로 자리잡았다. 현재의 왕실도 이 오라녜가다. 네덜란드의 상징색이 오랜지색이고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을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네덜란드 왕실인 오라녜가문이 영어로 발음하면 오렌지이기 때문이다.) 빌럼의 부축을 받으며 왕좌로 향했다. 그리고 후계자 펠리페 2세가 카를 5세의 뒤를 따랐다.
이 브뤼셀이라는 도시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다들 알다시피 브뤼셀은 현재 벨기에의 수도이다. 그리고 벨기에는 당연히 네덜란드와 다른 나라이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우선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사실상 하나의 나라로서 부르고뉴 공국에 속해있었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상속권은 앞서 대영제국 편에서 설명한 복작한 혼인 동맹으로 인해 합스부르크가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인 카를 5세가 브뤼셀의 궁정을 중심으로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합친 저지대 국가(The Low Countries) 전체를 다스렸던 것이다.
카를 5세의 퇴위는 당시 유럽을 강타하고 있던 종교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유럽의 거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던 그는 애초에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의 권위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신교 진영은 그의 재위기간 내내 확대되기만 했다. 결국 적극적인 개입으로 정책을 바꾸어 1546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신교 진영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승전에도 불구하고 신교 진영의 제후들은 좀처럼 굴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교 진영에서 합스부르크가의 숙적인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카를 5세에게 대항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신교 진영에게 결정적으로 양보를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카를 5세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퇴위를 결정한 것이다. 퇴위하면서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상속권은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 물려주었고 나머지 영지에 대한 상속권은 아들 펠리페에게 양도하였다. 따라서 당시 28살이었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왕국이면서 동시에 합스부르크가의 영지인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대한 통치권도 물려받은 셈이다.
퇴위식에서 카를 5세의 곁을 지켰던 또 한 사람인 오라녜 공 빌럼은 어린 시절부터 카를 5세의 궁정에서 자란 총신이었다. 카를의 궁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영주의 아들이었던 만큼 우선 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그저 인질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군주의 궁전에서 자라는 것은 군주에게 일종의 가족 같은 친밀감을 가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이런 인질들은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친밀감을 느껴온 군주의 가문에 자연스럽게 충성심을 가지게 된다. 군주는 이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대영주의 자식들을 궁정에서 키우는 것이다.
카를 5세의 퇴위 당시 빌럼의 나이는 22살. 펠리페보다 6살 연하였다. 아마도 카를 5세의 바램은 빌럼이 같은 세대인 아들 펠리페의 통치기간을 보좌해줄 믿을 만한 재상감으로 성장하는 것이었으리라. 당연히 빌럼도 카를 5세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할 각오도 충분했다. 카를 5세의 퇴위와 함께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시작되자 빌럼은 펠리페에게 네덜란드 귀족을 대표g서 충성을 맹세한다. 펠리페의 옆에서 펠리페의 치세를 돕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빌럼은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빌럼은 펠리페의 충성스런 신하로 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둘의 사이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독립전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보니 사람들은 이 전쟁이 일종의 민족해방 전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보통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쉽게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19세기 이래 무수한 민족주의 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곧바로 민족주의에 결부시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16세기는 아직 민족주의의 시대가 아니다. 앞장에서 설명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립과정을 참조해 보면 이 제국이 결코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함으로써 성립한 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독립적인 국가가 하나의 군주를 중심으로 결합된 형태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동군연합(군주국 간에 이루어디는 국가결합 형태로 복수의 국가가 조약에 의하여 군주를 함께함과 동시에, 군주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여 통치기구의 일부가 공통의 기관에 의하여 처리되는 국가를 말한다)이라고 부르는데 이 연합체는 그 안의 어느 한쪽 국가에 대해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우위에 있지는 않다. 따라서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의 한국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오라녜 공 빌럼이 자신을 카를 5세나 필리페 2세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생각한 것처럼 네덜란드인들도 합스부르크 왕가를 자신들의 왕가로 받아들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문제가 아니라면 네덜란드인들은 도대체 왜 독립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대해서 봉기한 게 아니라 펠리페 2세에게 봉기한 것이다. 물론 나중에 네덜란드의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 펠리페 2세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군대가 동원되었으므로 스페인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태도 띄게 되지만 애초에 봉기한 원인은 스페인이 아니라 펠리페 2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종교적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펠리페 2세가 즉위하게 된 시점에 종교개혁으로 인해 기독교 분파들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종교분파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를 믿는 사람들과 신교를 믿는 사람들 간에 널리 갈등이 일게 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신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는 지도자로서의 권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이단을 억압하고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그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독실한 신자의 종교적 의무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칼뱅 (개신교의 장로교회를 창설한 프랑스 출신의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