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와 빌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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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는 말 그대로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를 굴욕적으로 퇴위하도록 만든 신교 진영에 대한 증오심은 강렬했다. 문제는 이런 펠리페 2세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 의해 창시된 칼뱅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전 세기 그러니까 15세기까지 유럽 상업의 맹주 역할을 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을 물리치고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던 네덜란드 상인들 사이에서 칼뱅주의가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인기가 있었을까? 그것은 칼뱅의 주장이 네덜란드 상인들의 이해를 잘 보호해 줄 수 있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명의식과 운명예정론이다.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의 범위를 넘는 것이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선 라틴어로 소명을 뜻하는 보카티오vocatio는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소명이란 신이 인간에게 준 임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직업도 신이 주신 것이 된다. 따라서 상인들의 영리추구행위도 신이 주신 소명이므로 정당한 것이라는 논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세 때 유대인들이나 하는 더러운 직업이라고 천시되던 대부업도 금융업이라는 당당한 직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상인들로서는 당연히 대환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인들에게 칼뱅주의가 환영받은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지역공동체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모험에 나서야만 하는 상인들의 기질에도 칼뱅주의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신교 없이도 자본주의 기업이 발전하는 곳이 전 세계에 많습니다. 하지만 저지대 국가(네덜란드)의 경우 신교 개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기 훈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에 대한 강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공동체나 교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상인들은 스스로 일합니다. 스스로 거래합니다. 아주 독립적인 생활입니다. 저지대 국가에서 신교의 확산을 추적해보면 주로 도시에서 빠르게 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시는 정확하게 상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그리고 무역로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기 영국의 신교는 정확히 항구 도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네덜란드처럼 항구 도시는 거래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프랑스에서 신교의 영향이 강력한 지역은 대체로 항구 도시입니다. 라로셸La Rochelle, 보르도Bordeaux 같은 곳이죠. 무역과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일례로 무역로를 따라 신교 개혁 운동을 초적해볼 수도 있습니다. 16세기 신교와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있습니다.” - 스티븐 핀쿠스(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하지만 네덜란드 상인들 사이에서 칼뱅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펠리페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다. 탄압의 구체적인 형태는 네덜란드 전역의 종교문제를 총괄할 주교직을 신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비교적 자유롭던 네덜란드의 종교상화에서 중앙집권적인 주교직을 신설하는 것은 신교진영을 말살하고 각 개인의 종교생활에 간섭하겠다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였다. 탄압이 시작되자 네덜란드 상인들도 생각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때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은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게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을 달리 생각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펠리페 2세의 아버지인 카를 5세 치하에서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펠리페의 강경책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카를 5세는 저지대 국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부르고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저지대 사람이라는 말이죠. 거대한 독일 영토와 스페인 왕조를 물려받고서도 그는 항상 자신을 부르고뉴 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유럽의 맹주가 되고 싶었습니다. 펠리페 2세도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자신을 스페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이 스페인 왕조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또한 카를 5세의 출생 시대와 펠리페 2세가 성년이 된 시기에 큰 차이점에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로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가 열렸고 가톨릭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신교 종교개혁은 종교에 관해서 가톨릭과 다른 개념을 주장했습니다. 가톨릭 종교 개혁은 이에 대한 가톨릭의 응답과 이유입니다. 보편적 가톨릭 교회의 통일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약간 달랐습니다. 카를 5세는 스페인 혹은 독일의 가톨릭 신앙생활과 네덜란드 신앙생활이 다르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펠리페 2세는 단일한 보편적 교회의 통일성을 중요시하는 가톨릭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네덜란드에 주교직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던 이유입니다. 새로운 주교가 가톨릭 권위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단일한 보편적 교회의 통일성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카를 5세는 그의 아들과 매우 달랐습니다.“ - 스티븐 핀쿠스(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하지만 탄압은 오히려 더욱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적 억압에 맞서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와 성상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을 연관시켜 봤을 때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1566년의 성상파괴운동입니다. 개신교들은 가톨릭교회의 회화작품이나 동상, 다른 종교적 의미를 지닌 물건들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어로 Beeldenstorm 이라 불리는 성상파괴운동은 스페인의 통합정책을 반대하고, 가톨릭교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사건으로 펠리페 2세에게는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 루이스 식킹(레이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이때의 성상파괴운동은 물론 반 스페인 독립운동으로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사실 이 사건으로 인해 네덜란드의 독립이라는 결과가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종교적 탄압과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사실이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여전히 왕실을 사랑했다.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펠리페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믿는 종교를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만족이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종교인 가톨릭에 대한 도전은 곧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펠리페 2세에게 반 가톨릭운동은 동시에 반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펠리페 2세에게 반가톨릭운동은 동시에 반역일 수 밖에 없다. 펠리페의 왕궁인 엘 에스코레알로부터 강경한 진압명령이 계속 하달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펠리페의 이런 지시에 네덜란드 대귀족 대표였던 빌럼이 반기를 들었다. 빌럼이 반기를 든 것은 빌럼이 꼭 신교도여서는 아니었다. 가톨릭에 대항해서 신교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전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적 관용이야말로 네덜란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펠리페 2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사실 여러 종파가 공존하고 있던 당시 네덜란드 사회를 반영하는 것처럼 빌럼 자신도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독특한 존재였다.
“그는 (카를 5세의 궁정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뿐 아니라 스페인과 나머지 유럽인들처럼 에라스무스Erasmus 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성장한 후에는 신교인 칼뱅주의와 관련 있는 집안과 혼인했습니다. 그는 가톨릭과 신교, 양측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양쪽 종교를 가진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그의 귀족 친구들은 다양한 종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 스티븐 핀쿠스(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빌럼 1세는 카를 5세의 궁전이었던 브뤼셀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펠리페 2세의 통치 초기였던 1559년에 이미 홀란드와 젤란트의 총독이라는 주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빌럼 1세는 특히 펠리페 2세가 스페인으로 떠나고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카를 5세의 서녀. 펠리페 2세의 이복누이다. 1559년에 네덜란드의 섭정으로 지명되어 네덜란드를 다스렸다. 하지만 성상파괴운동으로 네덜란드 정국이 불안해지자 펠리페 2세와 불화하고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녀의 아들이 후일 네덜란드 독립군과 대결하고 펠리페 2세의 영국 침공계획에서 육군의 역할을 맡은 파르마공 알렉산데로다.)가 섭정을 하던 시기에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인문주의에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설사 금지되어 있더라도 사람들은 활발하게 개신교 교회에 나갔는데, 빌럼 1세는 사상과 종교 때문에 사람들이 처벌 받아선 안 된다고 믿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564년 국가최고자문위원회 연설을 통해 종교와 사상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청원하였습니다. 그는 중도를 지켰던 인물로 여겨졌는데, 네덜란드 봉기가 진행되면서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빌럼 1세는 언제나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지대국가가 전 지역에서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했지만, 그의 시도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 루이스 식킹(레이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루터파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으로 교육받고 칼뱅파 여인과 결혼했던 사람인만큼 빌럼은 종교적 편견이 없었다. 또 종교적 편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인 안목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애초에 서로 멀리 떨어진 다양한 민족과 종교적 전통을 끌어안고 있었던 당시 합스 부르크 제국의 현실에서 단일한 종교적 관점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빌럼은 펠리페 2세에게 종교적 관용을 인정해달라고 청원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탄압이 계속될 경우 자신은 내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위협도 불사했다. 하지만 빌럼의 청원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오히려 ‘지옥의 사자’라고 불리는 잔혹한 군인,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대총독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빌럼의 청원에 대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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