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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에 대해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모비딕은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오가는 책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단순히 고전에 대한 상투적인 찬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나의 작품이 수십, 수백년이 지나도 고전으로서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꾸준히 언급이 되어야하고, 꾸준히 언급이 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논쟁적이어야 하니까.

물론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는 말은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이다.

이 작품에서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 작품의 핵심적인 해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오감"에 대한 책인 것이다.



내가 느낀 모비딕은 '잡으려고 하지만 잡히지 않음'에 대한 책이다.

"잡히지 않음"은 비단 고래로서의 모비딕 뿐만 아니라, 책으로서의 모비딕, 철학, 고래학,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 등을 모두 포괄한다.

모비딕에 대한 한가지 해석이 확정되지 않은채,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는 것은, 이것이 잡히지 않는 책임을 방증하는 듯 하다.



고래를 처음 발견한 자에게 주어질 스페인 금화의 그림에서 에이해브, 스타벅, 스터브 등은 모두 각기 다른 상징을 본다.

에이해브는 강한 자부심을, 스타벅은 신의 두려움 앞에 선 인간을, 스터브는 돈을 본다.

고래를 발견한 자에게 주어질 스페인 금화는 곧 고래 모비딕이고, 고래 모비딕은 곧 책으로서의 모비딕이다.

그들이 잡으려 하는 것은 고래뿐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핍이 말하니

"나는 본다, 너는 본다. 그는 본다. 우리는 본다. 니들은 본다. 그들은 본다." [...]

"이 금화는 배의 배꼽이다. 다들 이걸 뺴내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배꼽을 빼내면 어떻게 되지? 하지만 여기에 남아 있으면 그것도 보기 흉해. [...] 황금이여! 귀중하고 귀중한 황금이여! 이제 곧 초록빛 수전노가 그대를 감춰버릴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아이러니를 느낀다. 배의 배꼽을 떼어내면 피가 나고 장기가 드러나겠지. 하지만 배꼽은 보기 흉하다. 우리는 배꼽을 떼어낼 수도 없고, 붙어있는 채로 놔둘 수도 없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모비딕을 잡을 수도 없고, 잡지 않을 수도 없다.



한 해석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애이해브의 목표에 대한 독선적인 태도가 그를 파멸시켰고, 그에 반해 관조적인 태도를 가진 이쉬마엘은 살아남았다는 해석이었다. 심지어는 에이해브를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태도로, 이쉬마엘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그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에이해브에 대한 그런 단죄적인 시각을 접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배꼽이) 여기에 남아 있으면 그것도 보기 흉"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쉬마엘 역시 모비딕에 대한 광기 어린 추구를 보여주고, 그것은 (가장 성공적인 모습으로) 실패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비딕이라는 책의 집필이다.



이쉬마엘은 말한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그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고래 분류법에 대해서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책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하며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느낀다. "도대체 왜 핵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지?" 이런 생각이 떠오른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쨌든 모비딕을 잡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쉬마엘은 피쿼드호와 모비딕에 얽힌 실재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려고 하다가도 한가지 주제에 꽂히면 그것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마치 그 설명만 끝나고 나면,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헀듯이 그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독자들은 여전히 모비딕의 이야기에 대해서 논쟁한다. (에이해브가 천체 관측기인 사분의에 대해 말하길: "너는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이 내일 정오에 어디 있을지 알려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무력하면서도 태양을 경멸하기까지 한다! 과학! 저주받으라. 너 무익한 장난감이여!")

둘째는, 고래는 본래 미스테리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쉬마엘은 고래에 대해 샅샅이 분석하다가도 어떤 부분들은 미스테리로 남긴다. 아직 당대의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있거나, 선원으로서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정확히 기술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마치 이쉬마엘의 의도인 듯 보인다. 그는 신에게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기도한다.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웅장하고 참된" 책을 후세의 손에 맡겨두었다.



애초에 잡으려고 하지 않으면 어떨까? 배꼽이 흉하다고 그것을 떼어낼 필요가 있을까? 그냥 배꼽이 보이지 않도록 눈을 돌리면 그만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핍의 사례를 보면 이런 태도 또한 광기처럼 보인다.

핍은 겁먹은 소년이다. 그는 고래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그에게서 도망치다가 포경보트 밖을 뛰어나갔다. 불쌍한 핍의 육체는 피쿼드호에 의해 구조되지만 그의 영혼은 익사했다. 그는 이후로 광인이 되어 에이해브 선장의 친구가 된다. 이 둘의 관계는 대조적이다. 에이해브가 잡으려다 광인이 된 인간이라면, 핍은 잡지 않으려다 광인이 된 인간이다. 에이해브가 고래에 의해 파멸했듯이, 핍도 역시 고래에 의해 파멸했다. 인간은 잡지도, 잡지 않지도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째야 하는가?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아쉽게도 나에게 이 책이 그 해답을 가르쳐주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이 책은 그 "잡지도, 잡지 않지도 못하는 아이러니"를 단지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실패하고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마치 극한에서의 수렴처럼, 고래에 대해, 책에 대해, 인간에 대해, 모비딕에 대해 수렴해가는 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목표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목표에 도달해가는 그 모습은 마치 "웅장하고 참된 건물"처럼 미완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성공적으로 실패한 책이다. 이 책은 완벽한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웅장하고 참된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