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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이방인’의 사전적 의미를 찾다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이방인
-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 유대인이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던 말.
그러니까, 이방인이란 무리의 바운더리 내에 속하지 않은 이를 경멸하는 단어다.
우리는 왜 그들을 경멸하는 걸까? 그들의 행동 양식이 우리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어른들의 기준에서 아이들이 저들의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은 저속하거나 유치한 행동으로 치부되고, 아이들의 기준에서 어른들의 형식적이고 비자율적인 삶의 방식은 어렵고 으스대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방인을 우스갯거리로 치부하는 것은 사실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임금님이 없는 곳에서는 임금님 욕을 해도 죄가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 그러나 다만 ‘이해하기 어려워서’라는 사려깊지 못한 마음을 근거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 이해하지 않은 채 실력의 행사에 나서는 경우가 왕왕 존재한다. 혐오를 행하는 부동의 동자로 인해 인간의 사회가 공포과 무기력에 지배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을 파헤치는 것이 모든 사유하는 사람의 책무이고 유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에게 모든 종류의 고통을 주는 시발을 ‘부조리’로 규명하고 그 연원과 향방, 첫과 끝을 전천후적으로 파헤치려는 카뮈의 시도는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1942년 발표작 <이방인>에서 어떤 식으로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그에 대응하여 어떤 식으로 행복해질수 있을지를 우화적으로 재구성한 에피소드를 선보였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시종일관 ‘아웃사이더’로서 행동하고 기능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고 천박한 군상과 쉬이 어울리면서 어떠한 근거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살인을 저지른다. 법정에 서서는 변론의 기회를 거의 또는 아예 제공받지 못하며 사형 집행 전 마지막 고해성사를 들어주기 위해 찾아온 목사에게는 욕설을 수반한 장광설을 설파한다.
뫼르소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반갑게도 시종일관 반항적인 인물이지만 당혹스러운 부분도 없잖아 있다. 그의 반항이 ‘무엇을 향하는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습작을 쓰면서 계속 느끼는 점은 소설에서 발생하는 ‘화살표’는 왠만하면 그 방향과 목적지점이 명확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어떤 대목에서는 장의사에게, 어떤 대목에서는 직장 상사에게 또 어떤 대목에서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반항적이다. 그러니 독해에 있어서는 난해함을 느낄 수밖에, 다 읽고 나서는 ‘그래서 이게 무슨 내용이었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작가가 설치한 강력하고 가장 가시적인 장치인 제목, 즉 <이방인>에 눈을 돌렸다. 이방인에 대해 떠올린 첫 두 문단의 내용을 가지고 돌아와 그의 행동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 구성물 하나하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적대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옳았고, 여전히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내 삶을 한 가지 방식으로 살았고, 다른 방식으로도 살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했고 나는 저것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진 않았지만 다른 일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거지?”
뫼르소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방인으로서 뫼르소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았음에 대해 철저히 긍정하면서도 ‘그래서 어떻다는거지?’라는 말로 스스로의 확신에 냉소를 보낸다. 이 긍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또, 이 냉소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스스로에 내재되었던 종류의 자질일까, 세계가 부여한 특성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 대사를 내뱉는 뫼르소는 세계와 대치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바운더리 내에 편입된 이방인은 부조리하다. 이 말은 동시에 두 가지를 의미하고자 한다. 그가 기득권으로부터 받는 핍박으로 인해 부조리를 겪는다는 사실과 그의 존재 자체가 기득권에게 부조리라는 사실이다. 다소 뜬금없는 이 중의는 주체가 어느 한 개체에 특권적으로 부여된 위치가 아니라 모든 타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허상이라는 단상에 근거한다. 허상으로서 주체는 다만 모든 것에 공포를 느끼고, 모든 것이 불안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실은 이방인인데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행복은 불가능한가? 일견 그렇게 보일수 있지만 뫼르소는 반항으로서 행복하다. 흔히 그런 말이 있다. 우주가 무한하고 따라서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가꾸기보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퍼질러 놀고 싶다고. 뫼르소에게 있어 그건 단순히 밈으로 치부될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존재론적 시련으로 부여된 영겁같은 부조리에 무한한 반항의 의지로 대응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있음을 경험한다. 그에게 더 많은 부조리의 경험은 더 높은 반항 의지로 이어지고 더 큰 행복을 낳는다.
“나는 내가 행복했고 다시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덜 외롭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가 처형당하는 날 많은 관중이 있고 그들이 증오의 함성을 지르며 나를 맞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릴 때 이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부류에 편입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는 상당한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 읽은 <이방인>의 뫼르소는 내 안에 큰 울림을 남겼다.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이방인>을 미친듯이 탐독하고, 묵독하고 때로는 크게 소리내며 읽기도 했다. 이 짧은 독후감을 적었다고 이제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내 안의 열기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한한 반항, 무한한 반항은 큰 희망이고 확고한 발전이다. 덧붙일 형용이 필요하지 않다.
무언가에 대한 반항의지가 내게 주어진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안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님은 부조리를 서로의 세계관, 가치체계가 다름에서 오는 타인에 대한 불이익으로 보시는 건가여?
제가 이해한 카뮈의 부조리 개념은 그것보다 좀 더 큰 개념이었던 것 같은데, <이방인>에서 읽히는 바로는 말씀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