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서적 <강자의 조건>에서 발췌함.
종교재판소
성상파괴운동이 번져가던 1567년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의 정국 수습을 위해 심복이었던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대총독에 임명했다. 이 임명은 펠리페 2세가 성상파괴운동에 참여한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 말살해야 할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바공작이 행정관료가 아니라 말그대로 철두철미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인답게 알바공작은 네덜란드에 부임하자마자 반도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알바 공작Duke of Alba은 펠리페 2세의 최측근 자문이자 매우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펠리페 2세는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알바 공작을 브뤼셀Brussels로 파견합니다. 알바 공작은 신교를 없애고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는 대단히 억압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벨기에 화가 브라흐Bruegel의 '죄 없는 자의 대량학살Massacre of the Innocents'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이 작품을 본 사람은 누구나 병사들이 성서 시대의 로마 군인이 아닌 스페인 군대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 알바 공작처럼 보이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거리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신교도와 반란군을 대대적으로 박해하는 것이 알바 공작이 추구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독립전쟁의 주요 인물을 많이 처형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떠났습니다." - 스티븐 핀쿠스(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알바 공작이 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위해 준비한 방식은 전시 군법회의 같은 특별법정을 세우고 이 법정을 통해 네덜란드의 지도자들과 신교도들을 합법적으로 말살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법정을 '피의 법정'이라고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피의 법정'에서는 불과 2년 동안 네덜란드 사람 1만 2천 명이 재판을 받았고, 1천 명 이상이 처형되었으며 9,000명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피의 법정'은 단지 신교도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도라고 해도 신교도들에게 관용을 주장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특히 빌럼과 함께 네덜란드를 대표했던 에그몬트 백작과 흄 백작의 처형은 네덜란드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들은 평생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바친 가톨릭교도였지만 신교도들에 대해 관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야 했다.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로 부임하여 펠리페 2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척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에그몬트와 흄 백작이 브뤼셀의 한 모임에 초청을 받았을 때 사실 빌럼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쳤지요. 에그몬트와 흄은 모임에 나가 체포되고 결국 브뤼셀 그랑플라스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벨기에의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며, 에그몬트와 흄 백작은 네덜란드 봉기의 순교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루이스 식킹(레이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가톨릭 이외의 어떠한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 펠리페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에그몬트나 흄처럼 처형되거나 빌럼처럼 도망쳐야만 했다. 기록에 의하면 네덜란드 전체인구의 2%가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2%라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귀족이나 상인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네덜란드의 신교도 지도층과 종교문제에 대해 온건한 귀족들은 네덜란드에서 거의 사라진 셈이었다. 곧이어 종교문제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땅이었던 네덜란드에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소가 설립될 것이라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보통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 그러니까 14세기 이전에 주로 횡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근대국가가 성립한 15세기 이후에 더욱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종교재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세는 가톨릭이라는 단일한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유럽이 확장을 시작하면서 유럽 내부에 이질적인 분자들 그러니까 무슬림이나 유대인 등이 늘어가자 오히려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냥해야 할 이질 분자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종교재판은 분명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와 종교적 불관용religious intolerance, 다양한 인구 정화purification의 일환입니다. 너무 학문적이고 세세한 것을 제외하고 13세기 이단에 맞서 교황이 시작한 종교재판과 15세기 말인 1478년 스페인이 시작한 스페인 종교재판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소위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개종했지만 진심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이 악명 높은 이유입니다.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고문한다고 위협하는 많은 정보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했습니다. 일반적인 법적 절차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 폴 프리드먼(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종교재판소의 역할은 단순히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후손들의 행동을 조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경찰의 역할을 하여 사람들의 행동과 사상, 심지어는 생각까지도 통제하였습니다. 종교재판소가 스페인에 설립된 이유 중 하나는 국민 모두가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정통이 아닌 것은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는데 그 중 가장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은 거짓 유대인 개종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종교재판소는 다른 종류의 행동과 사상에 대해서도 경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중혼, 동성애, 동성애적 행동, 마녀, 마녀술, 신성모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반하는 의견은 신성모독으로 비춰졌습니다. 이런 행위들과 이단은 종교적 범죄행위로 간주되었고, 종교재판소에 의하여 처벌받았습니다. 종교재판소는 1836년 폐쇄되었는데, 그 전까지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정치적인 의견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는 무시무시한 존재였지요.
가장 잔혹했던 형벌은 틀에 묶여 그대로 불태워지는 화형입니다. 불에 타면서 처형당하는 것으로 화형이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초기에는 화형이 자주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드물었는데 약 10퍼센트 정도였습니다. 화형을 당했던 사람들은 과거에도 종교재판소의 심문 등의 과정을 한 번 거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은 종교재판소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자백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개적으로 시민들 앞에 서야 한다는 행위가 굉장히 수치스럽고 모멸감을 느끼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운 처벌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다른 방식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녀로 체포된 여성들의 경우, 나체로 당나귀에 올려져 마을을 돌아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모든 재산을 압수하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처벌이었지요. 부유한 사람이 체포가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든 재산을 압수당하고 바로 거지로 전락하게 되죠. 이것 역시 (사람들이 종교재판소를 두려워했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징역형을 들 수 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종교재판소가 당신이 교화되었고 앞으로는 행실을 똑바로 할 것이라고 납득할 때까지 수감되었습니다. 수감생활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벌의 또 다른 예로 추방을 들 수 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종교재판소가 배정하는 곳으로 가족과 일을 모두 버려두고 멀리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히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것으로, 그들은 해안가나 국경지역으로 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탈출하여 런던이나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에 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매우 잔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마이클 알퍼트(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스페인식 종교재판소 이후 스페인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이웃국가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포르투갈인데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게 되자 포르투갈에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어 유대인들과 다른 이질분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소가 상륙할 것이라는 소문은 근거를 가진 것이었고 당연히 네덜란드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만한 소식이었다.
장구한 세월 인간은 사냥을 해왔다는 것. 이것이 인간 본질쯤에 속한다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