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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은 영어 책을 집어 든 것도 있지만 책 읽다가 한 눈을 자주 팔아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읽진 못했다. 그래도 읽었던 책들은 저번 달과 마찬가지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거울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Through the Looking G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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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Life, what is but a dream?)”

- 거울 나라의 앨리스 中 -

영국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각각 1865년과 1872년에 출간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전자의 경우에는 작가 본인이 교수로 재직했던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 학장의 딸인 앨리스 리델과 친하게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앨리스가 이걸 책으로 내달라는 부탁을 해서 출간한 작품이고, 후자는 전자의 후속작으로 출간한 책이다. 사실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다 보니 여러 대중매체에서 레퍼런스로 녹아들어 있어서 대강 어떤 작품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원전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사서 읽어봤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글자로만 가득한 책을 읽고 있는 언니와 강둑에 앉아 있는 소녀 앨리스가 도대체 그림이 없는 책을 뭐하러 읽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지루해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정장 코트와 조끼를 입은 토끼가 회중시계를 보며 늦었다고 소리치며 뛰쳐나가는 걸 본 앨리스는 이를 쫓아갔다가 토끼굴을 발견한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소녀가 굴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주하게 된 황당하고 기이한 세상을 탐험하게 되는 게 이야기의 골자이다. 이후 출간된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집안 응접실에서 검은 새끼 고양이와 놀아주던 앨리스가 벽난로 위에 있는 거울을 보고서는 저 안에 담긴 세상은 어떻게 생겼는지 호기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이를 직접 확인하고자 거울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안개처럼 변한 거울에 들어가게 되는데, 기존에 우리가 살던 세상이랑 물리법칙이 정반대로 돌아가는 이상한 세상을 마주하며 이를 탐험하는 게 주 플롯이다.

두 작품 모두 앨리스가 환상의 나라를 탐험한다는 게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만 단순한 판타지 모험 소설하고는 결이 다르다. 이 책에 그려내는 가상의 세계는 어린 아이들이 생각해 낼 법한 엉뚱하지만 번뜩이는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우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황당한 말을 하고 이상한 행동을 저지르며 웃음을 자아내고, 작중 벌어지는 사건들도 명확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기 보다는 마법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다. 속된 말로 설명하자면 이야기의 구성이 기-승-전-결을 갖췄다기 보다는 끊없는 넌센스로 점철된 병-병-병-병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인 앨리스도 7살 소녀이다 보니 혼잣말을 즐겨 한다던가 가끔 생각없이 말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이 다분히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데 작품의 분위기하고도 잘 녹아들어서 캐릭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후속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경우에도 전작과 비슷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공유하지만 거울 속 세계를 다룬 이야기인만큼 현실 세계하고 반대되도록 물리법칙을 뒤틀어 놓았는데, 이를 통해 아이러니를 자아내며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두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특징으로 언어유희가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 대부분이 언어유희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순 발음이 유사한 단어들을 늘어놓고 단어들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웃음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언어유희에 맞추기 위해 문단 구성도 뒤틀어 놓기도 한다. 또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작가 본인이 단어를 임의로 조합해서 신조어까지 만들 정도이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내용 태반이 언어유희인데다가 이걸 다 풀어내면 밑도 끝도 없거니와 구구절절 설명하면 재미가 반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을 조금 아끼도록 하겠다. 유명한 동화이니 만큼 국내에도 번역서가 꽤 많은 편이지만 상술하였듯이 말장난이 원체 작품의 적잖은 점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영어 공부 하는 셈치고 원서를 사서 읽거나 아니면 번역본과 같이 사서 읽는 걸 추천한다.

2. 진지함의 중요성과 다른 희곡들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and Other Pl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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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건 아주 가끔식이나 순수한 법이지. 결코 단순하지도 않고 말이야. (The truth is rarely pure and never simple.)"

- 진지함의 중요성 中 -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집인 진지함의 중요성과 다른 희곡들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와일드가 문학가로서 첫 발을 디딘 작품은 시집이였고 이후 행복한 왕자, 아서 새빌 경의 범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의 소설을 집필하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와일드에게 큰 부와 명성을 안겨 준 건 바로 희곡이었다. 그래서 와일드의 팬(?) 이라고 볼 수 있는 나는 꼭 희곡집을 읽어보는 걸 버킷리스트에 올려 놓았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어보면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은 와일드의 희곡 중에서도 대표작인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를 전면으로 내걸었지만 이외에도 희극인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 보잘것 없는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 이상적인 남편 (An Ideal Husband) 단막극이자 비극인 살로메 (Salomé), 피렌체의 비극 (A Florentine Tragedy) 이 같이 수록되어 있었다.

수록된 희극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빅토리아 시대 부유층의 삶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 플롯이 되는 건 부유층 남녀의 연애 편력이나 치정극인데 와일드의 냉소주의와 글빨이 만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대사들이 제법 많다. 가령 예시를 들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망치는 게 두 가지 있는 데 하나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여자고 다른 하나는 유머 감각이 없는 남자다."라던지, "결혼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나 보는데 나는 그걸 비즈니스라고 부른다." 같은 대사들이 4편의 희극에 산재해 있다. 또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금욕적이고 정결한 삶을 이상으로 삼았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데,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시류를 맹종하면서도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는 불륜을 저지르거나 이중생활을 즐기며 자기 욕구의 충실한 부유층의 위선적인 행태를 거침없이 풍자하고 희화화하였다. 거기에다가 정조를 강조하는 빅토리아식 도덕관이 성별에 따라 불공평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처사에도 칼을 들이댔다. 어느 정도냐면 편력이 있는 남성은 젊은 날의 불장난 정도로 치부되는 데 비하면 여성의 경우에는 더 빡빡하게 적용되어 아예 불경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는 당대 여성들이 이런 식의 도덕관에 저항하기 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순응하며 도덕적인 잣대에 맞지 않는 여성을 헐뜯는 모습도 묘파해내면서 불합리한 윤리관에 찌든 그 당시에 영국 사회를 조롱하였다.

이렇게 까지만 얘기하면 그냥 사회고발만 목적으로 삼는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술은 응당 아름다워야 한다고 천명하던 와일드가 집필한 작품이니만큼 기교적으로도 훌륭한 만듬새를 갖췄다. 상술하였듯이 작가 본인의 필력을 십분발휘하여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대사들로 극을 꽉 채워놓았다. 그리고 와일드의 유머감각도 잘 녹아들어 있다보니 다루는 소재들은 다소 발칙한 것들이긴 하지만 워낙 웃기게 연출해 놓았다보니 마냥 불쾌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극을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스카 와일드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특정한 대사를 그대로 반복하거나 아니면 주어와 술어 또는 목적어의 순서를 도치시켜 반복하는 방식 (예: A는 B가 될 수 없지만 B는 A가 될 수도 있는 법이지.) 으로 아이러니를 자아내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희극에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그렇다보니 작품 내 유머 코드들은 웃음 포인트가 반복되는 러닝 개그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는 현대 코미디에도 채용하는 방식이니만큼 지금 읽어도 피식하거나 빵터질 정도로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서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짜임새가 엿보이는데 지나가듯이 언급되거나 보이는 소품들을 중요한 순간에 배치시켜서 극을 전개시키는데 적절히 사용하였다. 와일드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이야기에 총이 등장하면 그 다음에 반드시 총을 쏘는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며 극중 소품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론이 연상되었다.

같이 수록된 두 편의 비극인 살로메와 피렌체의 비극의 경우에는 당대에는 현대라고 볼 수 있는 빅토리아 시대가 영국이 아니라 각각 고대 이스라엘과 중세 이탈리아가 무대이다. 희극과 비극 간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할 수 있지만 유머와 아이러니에 치중했던 희극들과 달리 비극들은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두 작품 모두 등장인물들이 단전에서 쏟아내는 대사들은 하나같이 귀금속, 보석, 비단, 별, 달 등 온갖 사물들에 빗대어 자신의 애정과 감정을 드러냈다. 이게 너무 구구절절 읊어대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수성과 풍부한 표현력이 묻어나기도 해서 독자나 관객들의 감각적인 자극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또한 와일드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엿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간에 공통적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장점이 잘 들어나므로 와일드의 작품이 취향이라면 아마 희곡집도 만족스러울 가능성이 높으니 꼭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희곡을 꼽자면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랑 진지함의 중요성이 있다.

여담으로 내가 읽었던 펭귄 클래식 판본에서는 엮은이가 작성해 놓은 서문과 방대한 양의 주석이 같이 들어있었는데, 해석과 주석의 내용 자체는 단순히 시대상을 설명해주는 걸 넘어서 엮은이가 연극을 전공한 학자이다보니 단순 글로만 보았을 때는 놓치기 쉬운 연출이나 등장인물들의 동선 및 공간 배치에 대해서 세세히 분석해줬고, 와일드가 상연하기 전 작성했던 초고본이나 옛날 영국 연극의 사전 검열을 담당했던 궁내청(Lord of Chamberlain을 필자가 임의로 번역하였음.)에 제출했던 극본과 연출가들이 추가적으로 달았던 메모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비교해준 만큼 꽤 훌륭했다. 다만 문장을 너무 길게 늘여쓰는 경향이 있었던데다 현학적인 어휘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물론 내 어휘력이 썩 좋지 않은 덕도 있지만) 읽기가 좀 힘들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주석들 중에 너무 분석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뒷내용을 스포일러하다 보니 온전히 작품을 즐기기 힘들었던 점은 좀 아쉬웠다.

3.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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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中 -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현재는 부커상으로 변경됨.)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던 한강의 또다른 역적 소년이 온다를 읽어봤다. 요즘들어 외국 문학은 많이 읽어봤지만 정작 국문학은 너무 등한시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한국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또 맨부커 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한강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진 않있지만 막상 작가의 책은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길래 이번 기회에 비평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이 책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면 총 일곱명의 시선을 통해 당시 지옥도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당시 광주의 참상과 그 반향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하듯 이 책은 군상극의 성격을 띄고 있어 각 장 (chapter) 마다 서로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각 장마다 주인공을 달리 한만큼 주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 주인공들 중에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를 찾고 있는 이도 있고, 목숨과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도 있고, 학살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도 비극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도 있고, 크디큰 상처를 받은 끝에 악몽에 사로잡혀 버린 이들도 있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도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늦게 참상을 알고 충격을 받은 작가 본인이 있다. 하지만 서로가 상이한 장들도 딱 한 가지 공통점으로 수렴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까까머리를 하고 교련복 셔츠와 하늘색 바지 차림을 하고 있던 조그만 중학생 소년이자 첫 장의 주인공을 맡고 있는 동호이다. 사실상 이 소년 한 명을 통해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앞서도 설명드렸듯이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 중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를 소재로 삼은 책이다. 이전까지도 5.18 민주화운동을 다뤘던 창작물은 그 수가 적지 않았지만 이 작품만이 가진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바로 민주화운동이 가진 정치적이나 역사적인 의의에 집중하지 않고 학살의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상세히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계엄군의 곤봉과 총칼에 맞아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이 부패해가는 모습을 무서우리만치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시위 도중 연행된 사람들이 겪었던 악랄한 고문과 수감생활을 실감나게 담아내는 등 육체적인 상처에도 초점을 맞추는 한편, 학살극이 벌어진지 수년에서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대인관계가 망가지거나, 감각이 무뎌지거나, 끝내 삶을 비관해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풀어내며 정신적인 상처도 조명하였다. 그런데도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는데 상술한 예의 상처들을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자세하게 묘사했지만 딱히 애끓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집어 넣지도 않았고 가해자들을 형한 불타는 응분의 메시지도 넣지 않았습니다. 차갑고 건조한 문체를 통해, 문장으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서늘하게 어루만지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덕에 책을 읽으면서 오로지 피해자들의 아픔에만 몰입하면서 광주의 참극을 되새길 수 있었다.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연신 눈물을 흘렸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개처럼 죽어가거나 이루 말 할 수 없는 참담한 고난을 겪고 후유증으로 인해 삶이 무너져 버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슬픔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애먼 사람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안겨준 주범들이 제대로 된 댓가도 치루지 않고 호의호식하고 있거나 천수를 누리다 간 모습이 겹쳐 분노가 일기도 하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기분이 내내 울적해질 정도였다.  이처럼 우울한 책이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드리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다. 다만 평소에도 5.18에 관심이 많았다면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을 만큼 수작이니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4. 라쇼몽 외 (羅生門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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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행을 어떻게라도 극복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바라보던 쪽에서 왠지 섭섭한 마음이 된다. 조금 과장하여 말하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긴다."

- 라쇼몽 외에 수록된 단편 코 中 -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이자 유미주의와 합리주의적인 필치로 명성을 날렸던 대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의 라쇼몽 외 단편집을 읽어봤다. 아쿠타가와는 일본의 근대 시기 중 가장 평안했다고 알려진 다이쇼 시대 (1912~1926) 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문단에 등단한 1915년부터 35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1927년까지 일본 문학사에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긴 단편들을 여럿 집필했다. 작가가 집필한 소설들은 일본의 문학가들은 물론 일제 치하에서 활동하던 한국 문학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여태까지 일문학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서 입문작을 무엇으로 할지 꽤나 고심했었는데 우연히 알게 된 아쿠타가와에 대해서 제법 관심이 생겼고 마침 제 가족 중에 작가의 단편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이번 기회에 부탁드려서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 전면에 내걸린 단편 소설인 라쇼몽 (羅生門) 외에도 16개의 단편들이 수록되었는데, 모두 길지 않은 분량에도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는 수작이다. 수록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 대부분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추악한 감정들을 샅샅이 파헤쳐서 보여주는 심리극적인 요소를 갖췄다. 자기 잇속을 채우고자 저지르는 악행을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자기합리화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내기도 하고 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은연중에 품는 시기, 질투, 혐오와 같은 감정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추악함을 논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심리 묘사를 논리정연히 전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사람이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머리 속에 품고 있는 아집에 따라 갖게 되는 편향적인 시선도 포착해서 작품 속에 담아냈다. 이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이나 화자 (話者) 에게도 적용하여서 이들이 얘기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믿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제법 어두운 편이며 인간에 대한 불신도 완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까지만 보면 아쿠타가와는 일견 칙칙하고 차가운 글만 쓰는 작가로 보이기도 하지만 유미주의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배경과 감정 묘사도 탁월하게 해내는 작가다. 배경에 관해서는 전등에 미미한 불빛에 의존해야 하는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저녁놀에 붉게 문든 정경까지 유화라도 그려내듯이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감정의 경우에는 상술하였듯이 야멸찬 증오와 은연 중에 품은 시기와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내면도 송곳과 같이 날카롭게 그려내지만 지루한 일상에서 마주하게 된 뜻밖의 환희, 애처로운 회한의 감정,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된 한 여성을 향해 품게 된 수줍은 사랑까지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보고서는 아무나 문학가 하는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났다. 개인적으로는 아쿠타가와의 작품에서 일전의 보르헤스, 카프카,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품에서 느꼈었던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이런 천재적인 작가가 투병 생활과 당대 문학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좌절감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삶을 비관하게 된 점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들을 꼽아보자면 '사촌이 땅을 싸면 배가 아프다' 같은 속담에서 처럼 타인의 행운에 질시하는 사람의 면모를 담아낸 단편 '코 (鼻)', 작가가 가진 유미주의 예술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충격적인 중편 '지옥변 (地獄変)', 질투와 회한의 심리를 아름답게 그려낸 단편 '가을 (秋)', 인간의 편향된 시선을 추리극 형태로 풀어놓은 단편 '덤불 속 (藪の中)', 사랑의 감정을 손편지로 쑥쓰럽게 꾹꾹 눌러담아 쓴 것 같은 단편 '인사 (お時儀)' 가 있다. 혹시라도 일문학에 관심이 생겼다면 본책의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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