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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예전에는 이 허무주의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되 사실상 술에 바치는 헌사에 가까운 글이라 좋아했지만, 지금은 전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 보니 내가 한층 더 포용력이 넓어졌다고 긍정적인 착각을 해보고 싶지만, 사실은 그저 내가 저자와 조금 더 닮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일반적인 가치의 붕괴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굳이 언급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시대고, 작중에서 <오를락의 손>이 암시하는 어떤 예술성의 끝에서의 야만적 파탄 대신 기술의 끝에서의 인간적 파탄이 자리잡은 시대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일반적이느냐는 그리 중요하진 않다. 그저 어째서 제프리 퍼민과 그 밖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허무주의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근거일 뿐이니 말이다.



제프리 퍼민, 알콜 중독자 영사는 과거 군대에서 부하들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술에 빠져 살게 되었다. 이는 기실 <화산>에서 몇 번이고 강조되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 파탄의 징조인데, 전쟁으로 인한 증오로 인해 포로들을 화덕에 넣어 죽여버리는 전쟁 범죄를 자신의 이름으로 책임지게 되며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쳐지나갔다가 사라진다. 이미 영사의 머릿속에서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술독에 빠져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회상과 현실의 중첩, 그리고 이따금 찾아드는 환각이다. 연거푸 술을 마시는 영사의 생각은 뚜렷하지만, 감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믿을 수 없는 서술자 이상으로 서술자 본인이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한 게 맞는지 몇 번이고 의심하는 상황이다. 



그러한 꿈 같은 상황 인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환각이 화려하게 쌓였다가 무너졌다 하기를 반복한다. 장 콕트의 <오르페 삼부작>이 떠오르는 것은, 술을 매개로 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인격적 죽음과 부활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그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결코 이루지 못하는 탓이리라. 예전에 <화산 아래서>를 읽을 때 이 책에서 제프리가 말하고자 한 그 무엇을 알고 싶어 독주를 마시며 읽었는데, 그의 통속적인 절망과 좌절이 환상에 사로잡히며 이루말할 수 없는 자기 안에서의 독백으로 변해갈 때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안에서조차 명민해진 생각 사이로 다시 한 번 도피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이본이 영사가 끔찍해하며 마시는 메스칼을 입에 댄 후의 생각이 그것을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든 영사의 알콜 중독증과 주변과의 불륜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멕시코가 아닌 다른 어디로 함께 탈출해 새로운 집을 꾸리는 상상을 영사에게도 말하며 여러 차례 상상하지만, 술기운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상 속의 집이 그 내부만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채로, 사방에 불이 붙어 겉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는 환상을 본다. 이것은 알코올이 중독자에게 주는 위안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세상으로부터의 감각을 둔하게 끊고 자기 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오직 생각만을 할 수 있는 것.



일찍이 백주를 마시고 흩어져 혼자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던 때,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눈을 감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 동안 놀라울 정도로 그 음악이 분명하고도 감동적으로 느껴졌되, 그 주변의 어떤 것도 인식되지 않은 상태로 몇 십 분을 서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카타르시스로 <정화된 밤>을 들으며 느낀 그 음악의 질감과 구조를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장 추한 외면을 가진 상태에서 놀라울 정도로 바짝 당겨진 그 의식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정화된 밤>을 다시 들어보곤 하지만, 그 때 체감했던 음악적 구조에 대한 지식이 떠오르되 그 이상의 생각이 새롭게 생겨나지는 않는다. 맬컴 라우리가 <화산 아래서>를 쓰며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것도 아마 이래서였을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