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e>에서 발췌함



전쟁이 낳은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89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삼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18세기 말 작위를 받은 하이에크 집안은 대대로 학자를 배출할 만큼 학구적인 가풍을 자랑했고, 외가 역시 유명 경제학자를 둔 명망가였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가문의 명성에 부응하는 영민한 아이는 아니어서, 1917년 오스트리아 통신장교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까지 두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났다.


사관후보생 과정을 마친 후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 하이에크는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전선에 목이 걸리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그런 위기를 제외하면 전장은 하릴없는 기다림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하이에크는 전장에서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옆에 놓인 경제학 책을 집어들었고, 이후 경제학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며 전쟁은 종식됐다.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모두 귀향했으나, 돌아온 고국은 더이상 5000만 인구를 통치하던 제국이 아니었다. 독일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ㅡ헝가리 제국은 1919년 9월 10일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이민족의 분리, 독립, 징병 제도 금지, 군비제한, 배상금 등을 규정한 '생제르맹조약'을 연합국과 맺었다. 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이 독립하고, 오스트리아ㅡ헝가리제국은 옛 영토의 70퍼센트를 잃었다.


몸통이 잘려 경제력 대부분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정부는 승전국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화폐를 찍어냈다. 시자잉 수용할 수 있는 동의 수백 배가 유통되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몰아닥쳤다. 돈이 제 가치를 잃으면서 전쟁 전 0.5마르크였던 빵 한 덩이가 1923년 100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아이들이 돈뭉치로 블록놀이를 하고, 벽지 대신 돈을 바르는 일은 일상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종전 후 빈대학 법학부(법학부에서는 경제학도 가르쳤다)에 입학한 하이에크는 지독한 경제난 속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저축해둔 돈이 종이쪽지가 된 상황에서 의사인 부친이 진료비를 올려받으며 간신히 생계를 잇던 그 시절, 산업혁명 이전으로 후퇴한 경제적 현실에 하이에크는 인플레이션과 국가의 시장 참여에 적개심을 품는다. 시장에 대한 절대 신뢰, 자유에 대한 무한한 옹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전체주의를 불문하고 국가가 경제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극한 반감을 갖는 등의 하이에크 경제학의 특징은 (아마도) 이 시기에 기원한다.


'숙적'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처음 만나는 것도 이 시기다. 종전 후 케인스는 영국 재무성 대표로서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다. 자리에 모인 연합국 대표들이 단지 독일을 혼내줄 요량으로 과도한 배상금을 청구하자, 케인스는 그로 인해 민생이 파탄나고 정치적 반란 같은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며 반대하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된다. 이에 케인스는 사표를 내던지고 보름 만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집필하여 연합국의 비인도, 비이성적 처사를 비판한다. "우리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유럽인의 생활수준이 급속도로 악화돼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다. (...) 사람들이 이처럼 곤궁에 처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사회조직을 뒤엎을 수도 있고, 문명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케인스의 이와 같은 전망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민심과 정권을 장악하며 현실화된다.)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패전국 청년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하이에크도 케인스의 저서를 정독하며 남몰래 흠모하다가, 빈대학을 거점으로 삼은 오스트리아학파를 만나 경제학에 본격 입문한다.



100년 전쟁의 서막


오스트리아학파는 1차세계대전 이전에 결성돼 전쟁 및 마르크스주의와 부딪히며 이론적 체계를 갖춘 근대 경제학파다. 카를 멩거를 시조로 삼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보다 자유시장과 경쟁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특히 상품의 가격과 기회비용을 중요하게 여겼다.


1920년대까지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름 없는 새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9년 빈대학 경제학과 객원강사직 자리를 놓고 시연한 공개강의에서,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경기불황이 온다는 케인스의 '저축의 역설'을 비판하며 영국에 진출할 기회를 잡는다. 당시 영국 경제학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신고전학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알프레드 마샬과 케인스가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을 경쟁자로 여기던 런던정경대학 경제학자 라이어넬 로빈슨은 케인스에 필적할 만한 대항마를 물색하던 중 하이에크의 논문을 읽었고, 소비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경계하는 변방의 젊은 이론가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하여 1931년 로빈슨은 하이에크를 런던정경대학에 초빙, 케인즈와의 대결을 성사시킨다.


처음 두 사람은 1920년대 내내 영국을 괴롭힌 실업 문제와 관련해 국가의 통화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실제로 하이에크는 1931년 런던정경대학 학술지 『이코노미카』에서 케인스의 『화폐론』을 비판하며 도발했다. 하지만 1929년 10월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은 논점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옮겨,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경제사 100년 전쟁'의 화두, 즉 시장경제를 무너트리는 요인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무엇이며, 향후 같은 상황을 예방할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를 놓고 격돌하게 된다.


먼저 케인스는 유효소비가 줄어든 것이 불황의 원인이며, 정부가 제3의 경제주체로 항상 존재하면서 통화정책, 세금인하, 공공사업 등으로 유효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하이에크는 많은 투자로 인한 과도한 신용 확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꼽고, 저축으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한편, 시장이 자생적으로 질서를 회복하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시장은 이성이 갖춘 합리적 인간이 완벽한 계획을 갖고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를 갖고 만나는 장소이며, 시장에 대한 분절된 정보는 시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어떤 행위도 결과적으로 왜곡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니, 개인이 자유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펼치고, 그 경쟁이 최대한 유익한 결과를 낳도록 제도를 만드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요지였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에크는 시장경제 같은 자생적 질서를 계획경제 같은 인공적 질서로 바꾸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4년 출간된 『노예의 길』은 하이에크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낸 저서다. 하이에크는 당시 유럽에서 세를 불려나가던 사회주의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자유시장을 버리고 계획경제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한들 결국 폭정을 초래하기 쉬운 길로 들어선다"고 주장했다. 『노예의 길』은 훗날 신자유주의의 초석, 마거릿 대처의 정전이 된다.



1승 1패


1936년 케인스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하 일반론)을 펴낸다. 하이에크는 1941년 『자본에 대한 순수이론』으로 맞불을 놓지만, 우선 승자는 케인스로 결정된다. 대공황에 대한 하이에크의 진단이 옳았다 치더라도 해결방안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인데, 변변한 호구지책도 없는 극심한 불황에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1940년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수정한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그야말로 '일반이론'으로 받아들여 대공황을 탈출했다. 케인스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원했고, 그의 아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다. 그러나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아랍 산유국들이 원유생산과 수출을 제한하여 원유 값이 급등하는 '석유파동'이 일면서 하이에크의 역습이 시작된다.


원자재 값이 오르자 생산과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물가는 상승하는 스테크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케인스주의는 '불경기에는 물가가 떨어지고, 호경기에는 물가가 오른다'는 기존 이론을 거스르는 사태에 우왕좌왕했다. 불황에 대한 두 가지 대처법 중 하나가 오류에 빠지자 곧바로 다른 하나가 소환되었다. 그런데 이때 불려온 하이에크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 등이 포진한 시카고학파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경제학자들로서 '신자유주의학파'로도 불리는 시카고학파는, 자유시장을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부의 분배방식으로 여기며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면 자유로운 가격기능이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와 시카고학파는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에 당선되고,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주류경제학자로 부상했다. 영국과 미국은 공공지출 삭감, (부자) 감세, 국영기업 민영화, 노조활동 규제, 통화정책에 입각한 인플레이션 억제 등으로 교착상태를 돌파했고, 이들이 펼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이에크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현 시대에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적당한 정책"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방을 제외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사기업에 완전 일임하는 데 있었다.



양자택일을 둘러싼 질문들



1974년 하이에크는 자유주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이후 30여 년간 하이에크는 절대 지위를 누리지만, 2007년 판세는 또다시 뒤집힌다.


2000년대 초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IT버블 붕괴, 911테러, 아프간 이라크 전쟁 등으로 악화된 경기를 부양하고자 초저금리 정책을 펼친다. 주택융자 금리가 인하되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담보대출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거래량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2004년 정부가 초저금리 정책을 중단하면서 벌어졌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리가 오르면서 원리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대출자들이 잇따랐다. 설령 대출자가 망하더라도 주택 가격이 대출원금보다 높으니 손실 걱정은 없다고 판단해서 증권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잔뜩 사들인 금융기관들은 결국 대출금 회수 불능 사태에 처했고,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2007년 리먼브라더스 등 대형 금융사와 증권회사들이 파산을 선고하며 세계경제를 충격에 빠트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테에 케인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선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825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차입금을 경기회복에 쏟아부으며 이에 부응했다. 하지만 케인스식 처방에도 실물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정부부채 위기가 터지면서 움츠리고 있던 하이에크 진영이 반격을 재개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따라 먼 길을 돌아 또다시 불황 앞에 선 지금, '시장 혹은 정부'라는 양자택일은 간단치 않은 질문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하는가. 시장은 과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장소인가. 정부가 포괄하는 사회안전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실업자들을 방치할지언정, 공장을 놀릴지언정, 대공황에 허덕이는 수많은 대중의 절망을 못 본 체할지언정, 그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스템의 명성이 손상될지언정 진정한 원리를 찾아 후퇴하고 싶지 않다는 진성 보수주의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통제할 것인가. 위기마다 시장과 정부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는 의미 있는 일인가. 우리의 선택지는 이것뿐인가.



참고문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애덤 테블 저, 이화여대통번역연구소 역, 아산정책연구원, 2013

『케인스 하이에크』 니컬러스 웹숏 저, 김홍식 역, 부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