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방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주장한 철학가인 동시에 작가이다. 이것은 내가 일치감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주지하며 책을 읽었다.
닫힌방은 3명의 사람들이 죽어서 한 방에 갇히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 방에서 서로에게 불신을 느끼고, 경멸하며, 증오하기에 이른다.
남자 한명은 헌신적인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전쟁이 나자 반전주의자라는 이유로 도망치려다 총살당했다. 그러나 수시로 아내를 때리던 남자가 평화를 이유로 전쟁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비겁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여자 한명은 동생을 살릴 돈을 위해 돈 많은 부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불륜을 저질르고 임신한 아이를 죽인 살인자다.
마지막 한명은 사촌의 여자를 빼앗고, 사촌을 정신적으로 몰아넣어 자살하게 만든 레즈비언이다. 걍 썅년이다.
이들은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죄인이다.
그리고 이 세명은 죽어서 한 방에 갇히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고, 지옥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또다른 죄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대의 죄를 비난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동시에 레즈비언은 아이를 죽인 여자의 사랑을 원하고, 아이를 죽인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며, 전쟁에서 도망친 남자는 레즈비언에게서 자신이 비겁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얻고자 한다. 이 기묘한 삼각관계 속에서 이들은 동시에 서로를 혐오한다. 아내를 때리던 비겁자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무조건 긍정하는 여자를 혐오하고, 아이를 죽인 여자는 남자에게서 자신의 관심이 멀어지게 하는 레즈비언을 혐오한다. 레즈비언은 자신에게서 여자의 관심을 뺏어간 남자를 혐오한다. (사실 서로 혐오하는 이유는 잘 기억 안난다.) 이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광기를 표출하며 서로에게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정작 방 문이 열렸을 때는 누구도 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얼마나 생생하건 어쩔수 없는 지옥이고, 밖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 밖은 미지를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미지보다는 비록 죄인의 신분이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지옥을 택한다.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철학이 드러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렇다면 실존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자신이 누군가의 눈앞에 있어야만 실존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은 미지보다는 고통스러운 실존을 택한 것이다. 이 부분은 거울이나 매끄러운 금속처럼 스스로가 비쳐보이는 물건이 없다는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확인할 물건을 모두 없앤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남자는 말한다. 그럼 계속 하지. 그들은 계속해서 저 의미없는 증오와 사랑과 합리화로 점철된 삼각관계를 영원히 이어가는 것이다. 지옥속에서. 타인은 지옥이다. 노골적으로 쓰여진 이 문장을 나는 서로 영원히 이해할수 없는 간극 속에 지옥은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 글은 어찌보면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이 뒤에 나온 악마와 선한 신에서 사르트르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선이니 악이니 하는 가치들은 결국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 때문이다. 지옥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신과 악마,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가 당착에 부딪친다. 신이 없다면 지옥에 가는 사람은 누가 선별할 것이며, 선과 악이 가변적 가치라면 누가 무슨 이유로 지옥에 갈것인가? 사르트르는 이 문제를 영리하게 돌파한다. 사르트르가 보여주는 지옥은 현실의 호텔과도 같은 모습이다. 방을 안내하는 급사와 방을 청동 조각이 있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의자가 있으며, 급사를 부를수도 있는(비록 작동하지는 않지만) 종도 있다. 사르트르가 보여주는 지옥은 현실이다. 즉, 사르트르는 지옥이란 이름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사르트르는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래에 언급할 악마와 선한 신에서도 나올 문제인데, 너무 막혀있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완성도 자체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지만, 다 읽고 어떠한 의문도 떠오르지 않는 막힌 소설이었다. 같은 실존주의자인 카뮈의 <이방인>은 다 읽고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던 반면,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악마와 선한 신.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소설이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흐름도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짧게 요약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부족한 능력으로나마 요약해 본다면, 괴츠라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 모두가 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제를 만나, 자신의 '악'이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 '선'의 존재를 증명하기로 내기하고 일년간 돌아다니는 여정이다. 물론 이 글도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자라는 것을 떠올리면 눈치빠른 사람은 어떤 결말이 나올지 예상이 갈 것이다. 괴츠는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행을 배풀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을 보며 시름하고, 단정적인 '선'에 감화되어 증오가 거세된 사람들을 보며 모순을 느낀다. 결국 최후에 그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보살피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 보살핌받지 않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참 고민할 거리를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적 완성도로는 감탄이 나올 정도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지나칠정도로 직관적이다. 작가는 그냥 직빵으로다가 <내 생각은 이렇다. 그러니 너는 그냥 이런 걸로 알아둬라>하고 들이민다. 거기에 무슨 의문이 들겠는가? 그렇기때문에 고민하고 자시고도 없이, 작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구나. 하고 넘어가게 만든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고찰이 들지 않는 독자에게 비극적인만큼 작가에게도 비극적인 일이다.
어째서 사르트르가 훌륭한 철학가로 추앙받지만 작가로서는 다른 훌륭한 작가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평가를 받는 것인지 이해되었다.
잘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