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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거 좀 정리해서 다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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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이 갇혀 있다고 느껴질 때, 내 모든 일상이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일상에 조금의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수능 끝나고 나서 수험생들은 늘 해외여행을 꿈꾸고,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에 뭐할지 추천받을 때 거의 1순위로 나오는 게 여행이라는 걸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여행을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하고 있다. 


무진기행은 바로 그런 여행을 표현하고 있다. 윤희중은 지치고 힘들 때 마다, 무진으로 떠나 그곳에서 요양을 하고 온다. 그리고 무진기행의 시작 역시 지쳐버린 윤희중에게 아내가 무진을 권하면서 시작한다. 지쳐버린 윤희중은 무진으로 떠난다. 그에게 있어서 무진은 6.25때 도망간 고향이자, 연인과의 결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해준 곳이다. 그는 무진으로 떠난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지옥인 서울에서 도피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진기행의 윤희중은 단순히 자유를 갈망하여 도피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에게 무진은 단순한 자유의 갈망이 아니다. 무진은 결코 자신의 현위치에서의 도피라는 부정적 정의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무진의 자욱한 안개와 함께, 그에게 있어서 6.25 때의 무력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공간인 무진은 그 자체로 긍정적 정의가 가능하다.


2.


푸코는 그의 저서 헤테로토피아에서, 유토피아의 반댓말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했다. 헤테로토피아는 반(反)공간이자 기존의 공간에 대항하는 저항-공간이다. 하지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그 장소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헤테로토피아는 한 사회가 정상 공간으로 규정하는 경계 너머의 공간으로, 환상을 창조하거나 현실을 격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윤희중에게 있어서, 무진은 헤테로토피아이다. 무진은 결코 폐쇄된 공간이 아니다. 버스를 타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무진은 그와 동시에 매우 폐쇄적인 공간이다. 닫힌 사회라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페쇄적이다. 무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안개는 이 곳의 음산함과 폐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개는 단순한 폐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개는 폐쇄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비가시성을 의미하게 된다. 나 역시 상대를 쉽게 볼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상대 역시 나를 쉽게 볼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인터넷 공간을 통해 익명성이 보여주는 자유로움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무진은, 그런 의미에서 기존 공간의 규율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윤희중의 "헤테로토피아"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윤희중은 자신의 욕망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무진에 대한 혐오, 자신에 대한 혐오, 그리고 무진 사람들에 대한 혐오. 그는 하인숙과의 연애라는 낭만을 즐기지만, 결코 그를 서울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 그것이 무진의 규칙이다. 현실 세계의 규칙을 가져와서도 안되며, 무진의 규칙을 외부에 반출해서도 안된다. 이 엄격한 룰을 깨는 순간, 헤테로토피아와 정상 공간의 경계는 무너지며, 자신이 구현해놓은 실존하는 유토피아는 붕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진에서 자유롭게, 싸늘하게 자신의 본능을 드러내나, 결코 현실에 가져오지 않는다.


"한 번만, 마직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살면서 이 말을 한 번이라도 외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내 모든 단점, 잘못과 죄악 모두를 정당화하고 긍정하며, 끌어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규율을 "정상공간"에서 충실하게 이행한다. 때론 든든한 가장으로, 때론 현명한 상사로, 때론 열정 넘치는 부하로, 때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연인으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헤테로토피아로 도망간다. 내 평판에 그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은 폐쇄적 공간인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구현할 수 있는 상상적 공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욕망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술자리를 사랑하는 거라는 얘기가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동시에 욕망을 표출할 공간을 욕망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린 정상 공간으로, 정상인으로 복귀한다. 근대 사회가 은폐해버린 인간의 다양한 면은, 그렇게 이곳에서 표출하고 다시 은폐되어진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정상인이 되어버린 우리는 다시 사회로 귀환하며, 자신의 은밀한 면을 목격하고 수치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다시 무진으로 또 올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이기 때문이다. 추악하고 미움이 가득하고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은폐하면 은폐할수록, 그는 헤테로토피아로 더욱 더 간절히 가고 싶어질 테니까.


3.


우리는 모두 무진을 욕망한다. 내 평판에 그 어떤 데미지를 입히지도 않고, 내 모든 역겨운 생각과 한심한 구석까지 모조리 쏟아낼 수 있는 곳. 짙은 안개가 나의 모든 결점을 가려주는 음험한 천국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 세계의 구석에 존재하는 나만의 헤테로토피아를. 어쩌면 우리 모두는 무진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무진이 사창가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정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여친의 자취방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우린 스스로를 긍정한다. 안개로 자욱한 무진은 언제나 우리의 모든 것들을 가려준다. 마법의 반지를 낀 기게스가 그의 추함과 사악함을 그대로 표출한 것 처럼, 우리는 안개 자욱한 우리만의 무진에서 우리의 추함을 맘껏 표출한다. .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우리가 디씨질하면서 하는 말이다. 나도 병신, 너도 병신이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싸지르면서 그냥 노는 거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디시와 자신의 삶을 분리해놓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안전하게 표출할 수 있는 이곳에서만은, 사람들은 욕망한다. 때론 스스로를 부풀리면서, 때론 다른 사람을 부풀리면서, 이 가상의 공간을 자신의 욕망으로 물들인다. 그것이 우리가 인터넷을 사랑하고, 인스타를 사랑하며, 커뮤니티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현대 사회의 균일해지고 획일화된 공간의 유일한 저항공간이자 반(反)공간, 헤테로토피아가 바로 가상공간이기 때문이다.


p.s. 로1부가 대체 왜 금지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