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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


- 도는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이며, 그것은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 무위란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 방법이다. 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성에 따르기 위해 하는 행위도 포함한다.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읽어봤지만, 사실 노장을 제대로 이해한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나름 체계를 꾸려보려 노력해본 적도 있지만 역량 부족으로 간략한 분류 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의 사상은 문학적 표현으로 읽는 사람에게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마치 독일의 그 녀석처럼.. 하지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 얻기를 바라고 그것들을 정리하여 삶에 체득하기를 ‘욕망’한다.


박이문의 <노장사상>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훌륭한 책이였다. 저자는 노장사상은 체계를 종잡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노장의 의도이지만, 그 의도를 말하기 위해서, 서양철학과 대비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노장의 사상의 체계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노장 사상의 시작은 <도덕경> 제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로@@부터 시작한다. 도라는 것이 있으면 도를 깨닫기 위해 인간은 우리의 사고체계의 근원이 되는 언어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들을 구별하고 인식하는 것이며, 언어는 존재를 있는 그 자체로 표현할 수 없다. 단지, 존재에 임의의 언어를 갖다붙이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양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도 역시 마찬가지다. 도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이 도라는 단어를 만들고, 도라는 의미를 갖다 붙인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언어 없이 인간의 사고가 가능한가? 인식이 가능한가?

 

그런 의미에서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라는 구절은 이런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장사상은 인식론적으로 봤을 때 직관을 따른다. 언어가 대상에 닿기 이전의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상태를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직관을 통해 파악한다. 도는 우리의 언어 사용 목적에 벗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우주 만물의 원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타당한가? 노장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을 살피기 위해선 다른 측면도 분석해봐야만 노장사상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에 다른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개인적인 욕망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문제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으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겪는다. 하지만, 한 차원 더 높은 문제도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다. 이 근본적 문제에 대답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개인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이다.


이 궁극적 인간의 의미는 종교적이기도 하다. 틸리히는 ‘한 인간이 자기의 삶과 우주 전체 혹은 존재 전체와의 궁극적 관계에 관여할 때, 그는 이미 종교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장 역시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관계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므로 하나의 종교라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자신들이 노장의 적통자라 주장하는 도교와는 방향을 달리한다.)


종교는 크게 인격체가 있는 신을 믿는 종교와 신을 믿지 않는 종교로 나뉜다. 신이란 존재 앞에 인간의 궁극적 인생의 의미에 대한 방법도 크게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신을 믿는 기독교, 힌두교와 같은 종교는 신 앞에의 공포를 통해 죄를 강조하며, 우리 인간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 죄와 벌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세계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으며 복락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종교는 절대자로@@부터 오는 판결 선고와 상벌이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인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미지의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우환을 겪게 되고, 그 미지를 헤쳐 앎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노장의 ‘도’도 그 일환이다.


노장은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아 해결하고자 한다. 인간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눈, 우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상대적 관점을 벗어나 우주의 절대적 관점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인간을 넘어 우주의 근본원리를 깨닫고 우주와 자연에 따름으로써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미지로@@부터 발생하는 우환에서 해방될 수 있다.


신을 믿는 종교는 인간과 젖과 꿀, 복락이 넘치는 종교적 낙원의 세계를 따로 상정한다. 이것은 세계를 우리가 밟고 있는 현실세계와 종교적 세계를 구별한다. 이원론적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를 통해 복락을 안겨다주는 종교적 세계의 입증은 불가능하다. 종교적 구원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고통이 현실에서 해결될 수 없다면 종교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


노장은 인간의 현실과 종교적 복토를 구별하는 이원론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일원론적 관점을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택하는 종교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의 구원은 신과 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과 존재에 대한 앎을 통해 편협한 태도를 벗어남으로써 우환이 사라진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얻는 지락(至樂)의 길이 열린다.


 


그렇다면 노장사상에 따라 즐거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구체적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무위(無爲)다. 무위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행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거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연에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때론 행동하기도 해야만 한다. 무위와 구별되어야 할 개념은 인위(人爲)라는 개념인데, 인위는 인간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자연과 대립하여 자연을 도구로 이용하고, 자연을 지적으로 파악하여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지(知)를 통해 자연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화하여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 차원의 ‘인간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화를 부른다. 인간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른바 문화의 발생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고, 소외를 낳는다. 인간은 존재 차원(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존재라는 점)과 의식 차원(인간은 자연을 보고 서로 다른 것으로, 극복하거나 발전시켜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의 불일치로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를 낳는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인위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 욕망하고 투쟁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어떻게 무위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삶은 자연의 순리대로 가능한 즐겁게 살아가는 것 외엔 목적이 없고, 여타의 목적이 없다고 하여 허무해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것이 자연의 ‘목적’이다. 말장난이나 언어적 오해라고 생각되는 이 역설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인생은 과연 비극인가? 희극인가? 노장의 인식 전환은 비극을 희극으로, 희극을 비극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모든 것을 희극으로 바꾼다. 삶을 어떤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어린 애가 모든 것에 신기해하며 즐거운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이. 그것이 바로 노장의 소요(逍遙)다.


 


추가 의문


읽으면서도 저자는 노장의 사상을 니체의 사상과 비슷하게 분석했다는 생각이 수차례 들기도 했지만, 순순히 니체와 비교하는 저자를 보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굳이 내가 복잡한 비교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였다. 저자가 말하길 노장과 니체와 유사한 점은 특히 이원론적 세계관을 비판했다는 것이며, 인생은 고통이 아니라 즐김이라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노장과 니체의 차이점과 근본적으로 노장과 니체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니체와 노장 모두 인생을 즐기지만, 정도의 차이가 다르다. 니체는 인생을 있는 그대로, 즉 모든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긍정하고 더 높은 경지의 세계로 도달하게 하는 반면, 노장의 인생은 욕망이 나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노니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노장은 자연에 거스르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인위라 하여 인위로@@부터 탈피하여 무위를 추구했다는 점이며, 니체는 자연스러운 힘의 욕망들을 모두 긍정하고, 그 힘들의 다툼에서 승리한 힘에의 의지들을 모두 긍정함으로써 극복하고 초월한다는 태도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롤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롤을 하다보면 당연히 잘하고 싶은 마음이, 캐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그 게임의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이 욕구에 따라 치열하게 개빡겜을 하고 진 게임을 분석하고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관람하고 더 잘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거쳐 꿈의 무대 챌린저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 더 높은 경지를 위한 위버멘쉬의 경지라면, 노장의 경지는 티모를 골라 서폿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 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오직 게임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일명 즐겜러다. 잘하고 싶은 욕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따위는 없다. 이런 욕망은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포지션에 적합한 챔피언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인생 한바탕 재밌게 놀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대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노장은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욕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심하다 욕망이란 언어에 집착해 많은 오해에 다다른 결과, 노장이 말하는 욕망이란 자연에 위배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갖은 욕구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식욕, 수면욕, 성욕, 배설욕, 정복욕, 건축욕, 불멸욕 등등. 이 중에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위와 관련 있는 것은 식욕, 수면욕, 성욕, 배설욕일 것이며,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정복욕, 위대한 건축물을 쌓아올리겠다는 건축욕, 영원히 죽지 않고 싶다는 불멸의 욕구는 모두 자연에 위배되므로 인위적인 것으로 노장에 따르면 배척되어야 마땅한 것들이였다.


하지만, 정녕 그런가? 그저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자연적 삶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이라면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순박한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거기에선 어떠한 고뇌나 고통, 그 역경 끝에 피어나는 콘크리트 속의 한 떨기 민들레와 같은 절박함이나 숭고함이 없다.


어떤 것은 무슨 기준으로 자연의 본성에 포섭되고 어떤 것은 왜 되지 않는가? 도대체 자연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본성을 따른다는게 겨우 이런 것인가? 자연적 본성을 거스르는 노장의 ‘욕망’은 도대체 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던가?


물론 이 욕망은 우리에게 커다란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우리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크게 좌절하고야 만다. 누군가는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폐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를 살해함으로써 그 고통을 끝내고자 한다. 이 거대한 좌절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은 분명 인간을 좀먹는 질병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치료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 욕망을 뿌리째 부정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자연을 따르는 것은 분명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고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욕망 역시 자연적인 것으로 봐야하지 않느냐고. 욕망의 부정으로 인한 것은 오히려 인간의 자연이란 본성을 거스르는게 아니냐고. 오히려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거부함으로써 자연에 거부하는 것은 아니냐고. 오히려 고통을 낳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