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최근 포 단편선을 읽고 공포문학에 관심이 뿌적 늘어났다. 그래서 이참에 포의 계승자라고 알려진 러브크래프트의 책을 한번 찍먹해 보았다. 사실 럽크야 이 분야의 슈퍼스타기도 하고 냐루코쨩의 아버지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이름이야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읽는 건 처음이다. 현대문학판으로 읽었는데, 분량도 적절하고 괜찮았다.


러브크래프트하면 역시 '미지에 대한 공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것 만큼은 아직 한 번도 러브크래프트를 안 읽어 봤어도 아는 이야기이다. 알지 못하는 것, 낯선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공포. 내가 어린 시절엔 밤이 되면 미끄럼틀 아래 그림자에서 귀신이 튀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하곤 했던 거 같은데, 이런 것도 미지에 대한 공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 알 수 없다는 무지로.부터 일종의 편집증을 자극당하고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공포의 정의답게, 이 작품집에는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현상을 마주하고 몸서치치며 도망치는 인물들이 꽤나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안타까운게, 나는 그런 공포를 느끼기엔 조금 글러 먹은 것 같다. 원체 상상력이 부족하고, 태생적으로 감정기복이 적으며, 이젠 나이까지 많아진 나에게, 공포란 너무나 먼 감정이고, '미지' '무지'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듯 하기 때문이다.(특히 무지, 미지같은 감정은 오히려 내 미천한 지식를 자책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자극하는 뭔가뭔가가 되었음...) 어릴 적에는 동네 문방구에서 500원인가 1000원인가 파는 쬐맨한 괴담집을 사 읽으며 부들부들 떨곤 했는데, 그런 감상은 어린 시절의 특권이었을까? 이제 와서는 공포문학을 읽으면서도 공포를 느낀다기보다는 그저 그 이야기를 분석하고 분위기를 즐기는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그렇게나 인상 깊게 읽었던 포 단편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공포문학 독자는 못 되는 듯... 내가 아직 여중생쟝일 때 읽었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무기력함을 묘사하는 장면 만큼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우주에서 온 색체>가 바로 그것인데, 서서히 죽어가는 나훔 가족의 이야기는 진짜 으스스했다. 어느날 나훔의 집 앞에 커타란 운석이 떨어지고, 그 이후로 불가사의한 현상이 그의 가정을 좀먹기 시작한다. 기괴한 초목이 자라나더니 이내 바스러져 버리고, 가축들은 점점 매말라가더니 끝내 죽어버리며, 가족들은 서서히 쇠약해지고 미쳐간다. 나훔은 자기에게 하늘이 천벌을 내린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도대체 그 신이라는 작자가 누구인지, 자기가 벌을 받아야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가장 소름끼치는 건 이들은 집과 땅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도망은 내 사전에 최고의 갈등해결 방법이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포기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법이 불가능하다. 도망칠 수가 없다. 아니, 도망친다는 생각을 떠올리지조차 못한다는 게 너무나 소름끼친다. 원인 불명에 해결 불가능한 현상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좀먹어가는데 그저 현상에 순응하며 죽어가기만 하다니, 도대체 어떤 공포를 마주하고, 어떤 무력감을 느꼈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무력감이 가장 무섭다. 세상에 짓눌린 채 그냥 나이만 쳐먹어 가는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걸까? 오, 맙소사! 부디 그것 만은 아니길...


무기력함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까, 얼마 전에 동서양 신화의 차이점에 대한 책을 읽었던 게 생각나기도 한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동서양 신화는 자연재해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크게 다른다. 서양에서는 신-인 관계가 굉장히 엄격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현상이 신의 예정에 따라 이뤄져야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재해 역시 신의 예정 속에서 설명하려고 했고, 결국 자연재해란 신이 타락한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로 묘사하게 됐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신-인 관계가 느슨했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형벌이라느니 하는 묘사가 없다고 한다. 대신 재앙이란 인간과는 무관한 신들의 변덕과 싸움의 결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그저 아무런 원인도 없이 당할 뿐이다.


나는 이 동양신화의 이야기가 럽크의 작품들과 어느 정도 닮은 것 같다. 이 무기력함, 초월적 존재의 변덕에 그저 치여 죽기만 하는 인간의 운명이 러브크래프트가 말하는 '우주적 무관심'과 조금은 닮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 과학과 신학이 구분되지 않던 시절, 동양에서는 '신'이라는 존재를 끌어들여 자연재해를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 크게 발달하여 세속화된 시대에는 어떨까? 우리를 엄습하는 부조리한 고통은 그 형태만 바꾼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신은 이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현상 앞에 가족과 재산,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전부를 잃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공포만 남아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러브크래프트는 신이 떠나간 그 자리에 남은 순수한 인간의 공포를 발견하고 이야기로 풀어낸 것일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럽크하면 크툴루, 크툴루하면 럽크인데, 정작 이쪽은 별로 인상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원래 같았으면 크툴루 신화를 읽으러 황금가지판 전집도 읽어 볼 생각이었는데, 지금 당장 넘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저술한 공포문학 개론(?)인 <문학에 나타난 초자연적 공포>란 에세이를 읽어 보고 싶다. <공포문학의 매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도 있는 걸로 아는데, 이쪽을 한번 읽고 럽크 이전 세대 공포문학도 한번 읽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