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화학공학을 전공하는 공대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특히 아버지는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존재였다. 어머니도 사랑에 인색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너 또 우물우물 말할래?”라고 다그치던 일만 두고두고 기억날 뿐이었다.


이름을 잃어버린 소년

그는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본명은 게르하르트 히르쉬. 독일 나치가 한창 발흥하던 시기, 겁에 질린 아버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도 ‘호르스트’로 바꿨다. 집안 분위기는 늘 뒤숭숭했다. 그는 열두 살엔 교회에 심취했고, 열세 살에는 나치에 호기심을 가지기도 했다. 1939년, 열여섯 살엔 징집을 피해 스위스 로잔으로 떠났다가 나치의 박해가 심해 위험하니 돌아오지 말라는 부모의 만류에 그대로 스위스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제라르 호르스트’로 ‘개명’한 채 ‘무국적’ 상태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다. 돈도 없고 전망도 없고 소속도 없었다. ‘뿌리 뽑힌’ 삶을 사는 그에게 불안과 외로움은 가장 익숙한 친구였다. ‘나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는 늘 의문 부호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스물세 살의 그는 어느 특별 강연회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만난다. ‘도덕철학’을 공부하라는 사르트르의 권유로 이 공대생은 제도권 밖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마음 붙일 곳 없던 그에게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였다. 이후 사르트르와의 지적 교류는 1968년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들

그는 1947년을 뚜렷이 기억한다. 스물네 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다. 그녀는 스위스에 온 지 얼마 안 된 영국인이었고, 연극에 재능이 있는 밝고 명민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두 사람은 스위스 로잔의 어느 카드게임장에서 우연히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여든세 살이 된 그는 그때 그녀와 처음부터 하나로 묶여 있다고 느꼈던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다.

“아무리 우리가 뼛속 깊이 서로 다른 존재라 해도, 뭔가 근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난 느꼈습니다. 뭐랄까, 원초적 상처라고 할까요.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경험’, 즉 불안의 경험 말입니다. 우리 둘의 경험의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경험의 의미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 자리는 오직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고, 나중에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 일에는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아주 어릴 적부터 불안 속에 살았습니다. [...] 어머니는 그 뒤로 몇 년간 자주 두 사람을 보러 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지독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라 부르긴 했지만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분이 당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했지요. 두 분은 싸울 때면 서로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당신을 부르곤 했습니다.
당신이 느꼈을 혼란과 고독을 나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그런 것이 한 쌍의 부부라면, 차라리 혼자 살면서 절대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당신은 속으로 다짐합니다. 부모가 주로 돈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고는,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돈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혼잣말을 했지요. [...] 어른들의 세계에서 당신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강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당신의 세계 전체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난 항상 당신의 힘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밑에 숨은 당신의 연약함도 느끼곤 했습니다. 당신이 극복해낸 그 연약함을 난 사랑했고, 당신의 연약한 힘에 놀라곤 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보호해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어, 이 세상에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없던 자리를 말입니다.”


사랑과 혁명의 동반자

두 사람은 만난 지 2년 만에 결혼했다. 이 부부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고, 프랑스로 이주해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지적, 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은 기자 생활(이때 그의 필명은 ‘미셸 보스케’였다)을 하며 글쓰기로 푼돈을 벌 때, 그녀는 초상화 모델을 하기도 했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를 위해 자료 정리와 조사도 했고, 원고 교정과 비판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밝혔듯이 이후 그의 무수한 저술은 실상 그녀와의 공동 작품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이 아닌 것을 사랑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추상적인 철학 속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포함한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한때 그녀 또한 그를 ‘다른 곳’,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는 존재였다. 그곳에서 그는 “불법 망명자로서 미래라고는 석 달도 장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엄연히 현실로의 귀환"이었고, 그는 서른다섯 살에 펴낸 자신의 첫 책이자 자서전에서 그녀를 “동정심을 자아낼 정도로 불쌍하고 나약하며 의존적인 여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60년을 함께했다. 그렇게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소년은 세상에 두 발을 굳게 디디는 법을 배웠다. 그가 사랑했던, 그를 사랑했던 소녀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녀와, 이웃과, 이미 지나간 세대와 동세대와 미래에 올 세대와 함께 맹랑한 꿈을 꾸었다. 경영학자 강수돌은 그 소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의 이론을 사상적 경향으로 보면 생태사회주의 또는 사회생태주의다. 그는 노동이나 사회 이론, 생태주의와 관련해 수많은 글을 발표하며 공적 활동을 활발히 벌였지만, 그의 사적 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적인 차원의 따뜻한 사랑 없이는 왕성한 철학적, 저널리즘적, 정치적 작업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고백’을 앙드레 고르는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했다. 생각건대, 서로의 진실한 사랑이 그 내면의 깊은 상처를 하나씩 치유해나가자 각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상호 사랑으로 넘쳐흘렀으며 이것은 다시 ‘사회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고르가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모두의 ‘노동 해방’을 위해 평생 보장 소득이나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더 짧게 더 잘 그리고 다양하게 일하기), 문화사회 등의 비전을 제시한 것도 바로 이런 사랑이 바탕에 있었다고 본다.”


사랑의 지속성을 믿지 않는 시대의 사랑

1990년 그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린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과 화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성공적이었는데, 그건 내가 도린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가능했지요.” 1983년, 그녀, 도린은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고, 그, 앙드레 고르는 도린을 돌보겠다며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간다. 그리고 투병과 소박한 생태주의적 삶이 공존하는 곳에서 23년의 세월이 흐른다. 여든세 살의 앙드레 고르는 “여전히 내겐 이해하고 밝혀내야 할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으며, “우리 사랑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그 온전한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며 도린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2006년 3월부터 6월까지 쓰여진 이 편지를 엮은 책의 제목은 <D에게 보낸 편지>다. 그리고 이듬해 9월,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두 사람은 동반자살로 생을 마친다.




앙드레 고르(1923~2007)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언론인. 스위스 로잔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어느 특별 강연회에서 사르트르를 만난 후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49년 파리로 이주해 경제 전문기자이자 탐사취재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다. 1964년엔 진보 성향의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장 다니엘과 공동 창간해 1983년까지 일했다.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며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초기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국내에는 <D에게 보낸 편지><에콜로지카><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 번역 소개되었다.
1947년 한 살 아래인 도린과 만나 1949년에 결혼했으며 1983년 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공적인 활동을 접고 24년간 아내를 보살폈다. 2007년 9월 22일 자택에서 도린과 동반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