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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장에서 『하학지남』을 저술한 안정복의 학문 경향에 대해 서술한다. 안정복은 성호의 문인으로 들어가기 전, 『하학지남』과 『임관정요』에 드러난 실학 정신을 찾고자 한다. 『하학지남』을 통해 안정복은 이기론 사칠론과 같은 성리학 이론 논쟁보다 실제적 행동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안정복은 학문적 경향을 개혁하는 것에 머무르고 이기양처럼 새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인색하였다고 평가한다. (42~43쪽) 『임관정요』는 안정복이 저술한 목민서로 저자는 여기에 안정복의 실천적 개혁 사상이 드러난 저술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안정복의 역사서인 『동사강목』 사론과의 연관성에도 주목한다.
『임관정요』에서 찾을 수 있는 안정복 사상의 특징으로, 저자는 실익을 추구한 애민사상, 자립지향적 농본사상, 여론을 중시한 정치사상 등을 꼽는다. (84~88쪽)
이후에는 『목민심서』에 미친 『임관정요』의 영향을 분석한다. 정약용은 『임관정요』를 『목민심서』 저술에 참조하였다. 드러나 안정복이 피통치자의 입장에서 저술한 반면 『목민심서』는 수령의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둘째로 저술의 기본 배경이 유사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중시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두 저술의 쓰임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다. (90~95쪽)
2장은 성호 학문이 안정복에게 미친 영향이다. 안정복은 성호의 제자로 입문하기 전에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안정복은 『반계수록』을 고평가하고, 『임관정요』와 『동사강목』에 활용한다. (100~105쪽)
또한 성호 이익에게 역사학과 성리학에 관한 견해 역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황의 성리설과 역사 서술에 있어서 국사(國史) 중심의 서술체계는 안정복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22~127쪽) 다음 절은 안정복과 성호문인들과의 교류인데, 안정복은 윤동규, 이병휴 권암 등 많은 성호 문인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 왔다.
『동사강목』의 실학사상에 대해서도 저자는 크게 주목한다. 특히 그의 현실 개혁 사상과 왕권 강화를 통한 문제의 해결 중시, 사대교린의 중심으로 본 외교관계와 철저한 역사 고증 등은 『동사강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61~166쪽) 또한 『동사강목』에도 『반계수록』 영향을 받은 현실 개혁안이 나와 있으나, 저자는 『동사강목』보다 『임관정요』에서의 『반계수록』 영향을 더 크게 봄. (172~176쪽)
다음 장은 안정복의 벽위론에 대해 다룬다. 안정복은 불교와 천주교 양명학 등에 대해 노년기에 크게 비판하였다. 우선 그의 이단 비판은 성호학파의 소장 학자들이 이단에 심취하고, 이병휴, 윤동규 등의 학자들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와 고려의 예시를 통해 불교를 비판한다. 이후에는 서학에 대해 비판하였는데, 안정복은 1754년 시점까지만 해도 서학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205쪽) 그러나 이후 서학 비판을 전개하는데, 그 특징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배척하고, 서학서를 통해 서학 배척의 이론적 근거가 완성되고 있었다. (206~214쪽)
안정복은 1780년대에 이르러 천주교가 확산되는 현실에 우려를 표하며, 권철신 등을 설득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저술한다. 그는 이 두 저술에서 천당 지옥 문제, 내세의 문제 천주교와 불교와의 관계, 상제의 문제, 예수의 존재 등에 관한 서술을 통해 천주교 비판의 논거를 제공한다. (220~226쪽)
그는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225쪽)
「천학고」는 서학의 동래(東來)에 관한 글이며 안정복은 「천학고」 저술을 위해 많은 사서(史書)를 참고하였다. (226~228쪽)
「천학문답」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서이며, 문답 형식으로 유교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것이다. (229~242쪽) 또한 양명학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지를 펴고 있다. (242~246쪽) 다음 장에서는 안정복의 성리설에 대해 다룬다. 안정복은 기본적으로 이황과 이익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호 문인들 사이의 성리학 논쟁도 보았지만, 기본적으로 이기론 사단칠정론 논쟁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 이해 수준은 노년기에 이르러 상당히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후대 학자들에게 성리학 논쟁보다. 실천 중심의 하학(下學) 수행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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