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는 소설을 평가한다.
그런데 그건 일반 독자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 역할을 평론가에게 위임해야하는걸까 생각해봤다.
그 결과 나는 소설이 2가지로 나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는 소비자를 위한 소설, 다른 하나는 평론가를 위한 소설
도식화 해본다면 이렇다.
흔히 독갤에서도 "소설 왜 읽어?" 라고 글이 올라오면 "재밌으니까" 라는 답변이 곧잘 달린다.
사실 존나 맞는 말이다. 내 돈 주고 책을 사 읽는건데 재미없는걸 굳이 살 이유가 없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시간 죽일 책 한권이면 족하다."
베스트셀러를 아무거나 사서 시간을 잘 죽였다면 그만이다. 예술이고 나발이고 나는 내 소비에 충분히 만족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어떠한 객관적이고 예술적인 평가를 내리기보다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 상품을 선택한다.
예술의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방식은 납득하기 어렵다.
문학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오락 소설(소비자) 영역에서 통용될지언정 예술로써 소설(비평가) 영역에서는 명백한 정답이 존재한다. 목표로 삼고 지향해야 할 어떠한 방향이 존재한다.
비평가들은 취향을 배제한 채 어떤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품들을 쳐낸다. 작가들끼리 경쟁을 부추기며 누가 더 기준에 적합한 작품을 만들었는가 우열을 가려 문학상을 수여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문학상을 위해 경쟁하게 되고 결국 비평가를 위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예술은 더 이상 소비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얀 도화지에 점을 하나 콕 찍어둔 그림이 있다고 치자. 평론가는 그것을 훌륭하다고 칭찬할지 몰라도 소비자는 그런 그림을 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문학으로 친다면 이상의 시 오감도를 생각하면 편하다. 평론가들은 그런 시를 훌륭하다고 말하겠지만 소비자는 미쳤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 '예술'은 애초에 소비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알만한 사람은 알아주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지속되다 보면 평론가를 위한 소설과 소비자를 위한 소설이 완전히 계급화 되어 나뉜다.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이러한 피라미드 구조가 된다.
예술에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드러내놓지는 않아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아가리로는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귀천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평론가들은 문학의 방향성을 정하고, 문인들은 그러한 기조를 따르며, 세월이 흐른 뒤에 가장 높게 평가한 작품들이 "고전소설"의 반열에 오른다.
한번 그 지위를 획득한 작품은 절대 내려오는 일이 없다.
소비자는 주로 현대소설에 관심을 두며, 고전소설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문학상을 받은 현대소설이 간혹 들수는 있으나 이 또한 찰나다.
문학상과 일절 관계없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불편한 편의점, 달러구트 꿈백화점, 너의 췌장 등의 소설이 대중에게 사랑은 받겠지만 평론가에게 그들은 기준을 한참 벗어났기에 '예술'이 되지 못한다.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는 독린이에게 대뜸 고전 소설을 들이밀어서는 안된다.
세계 3대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설조차 막상 읽어보면 꽤 난해하고 지루하다. 고전소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먼저 현대소설을 권해야한다. 베스트셀러부터 시작하는게 좋다.
거기서 재미를 느꼈다면 십중팔구 "이런거 또 없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렇기에 아류작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또한 팔리는 것이다.)
그러면 비슷한 소설을 또다시 권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삼시세끼 일주일 한달 퍼먹다보면 물리기 마련이다.
그제서야 "좀 신선한거 없나?" 하고 다른걸 찾게 된다.
이제는 피라미드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을 권해도 된다.
삼시세끼 라면만 쳐먹던 사람이 '우동'을 먹는다면 아주 새로울 것이다. 비록 그 전에는 우동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라면, 떡라면, 만두라면, 병신찐빠라면을 다쳐먹어봐서 이젠 라면이라면 꼴도 보기 싫기 때문에 새롭게 다가오는 우동의 맛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거 또 없나?" 하면서 비슷한걸 찾으면 이제 어묵우동, 유부우동, 튀김우동, 생생우동, 사누끼 우동, 병신찐빠우동까지 싹다 쳐먹이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길들여야 한다.
이제 우동마저 질렸을 때. 이제 색다른거 뭐 없나? 하고 찾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고전소설을 추천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전소설은 이른바 평양냉면이다! 이게 분명 처음에는 슴슴한게 아주 뒤지게 맛이 없었는데 이제 우동의 가쓰오부시 국물 냄새만 맡아도 토할 정도로 질렸다면 이 소고기로 끓인 베이스의 슴슴한 국물 맛이 아주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이제는 평양냉면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아, 왜 이 맛을 몰랐을까!
(바~로 이맛 아닙니까?)
햐아...안되겠다. 라면 한그릇 때리러 가야겠다.
오호.. 독갤을 끊을 시간이 온건가?
하아?
뭔데 은근 통찰력 있음
평론가들은 문학의 방향성을 정하고, 문인들은 그러한 기조를 따르며, 세월이 흐른 뒤에 가장 높게 평가한 작품들이 "고전소설"의 반열에 오른다. 한번 그 지위를 획득한 작품은 절대 내려오는 일이 없다. 전까지는 동의하면서 읽었는데 이부분은 비동의함
문학상에 그치지 않고 고전으로 내려오는 소설들 보면 평단의 찬사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도 인정받은 소설임 문학의 장르에 그치지 않고 예술 전반으로 봐도 그럼 물론 평론가들이 예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대중들에게 소비되는 면도 있음 하지만 결국 그 예술성의 정점을 찍어주는 건 대중이 있기에 가능함
그 대중성의 기준 자체가 넘나 애매모호한 것. 어느 정도까지 널리 두루 읽혀야 대중한테 인정되는건데? 고전 중에 당대 대중들한테 엄청나게 잘 먹힌 소설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넘나리 많고 현대로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음. 영화든 머든 다 마찬가지. 현대예술의 난관이지. 현대적인 예술이 되려 할수록 대중이랑 멀어지고 있거든. 그렇다고 대중이 없기에 무가치하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간간이 양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작품들이 나온다한들 그런 경향성은 분명히 있음
응 맞아 근데 나는 지금 대중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아님 결국 아무리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도 대중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임 계속 내려오는 고전들 많지 근데 그중에 시간이 지나도 굳건한 것들은 예술성을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작품임 마치 평론가들에 의해 고전/예술이 결정된다고 말하는 건 너무 비약이지 않나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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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저무는가는 솔직히 잘은 몰라도, 이야기(서사)가 서서히 중요해지는 시점이란 말은 ㄹㅇ 동감. - dc App
맞춤법 심각하네 ㄷㄷㄷ
우동 먹고 싶다 - dc App
반대로 봐야할 것 같은데. 오락 소설은 명백히 정답이 있는데 예술 소설엔 없음. 예시로 든 미술작품은 타겟이 작품 하나에 몇십억씩 쓸 수 있는 아주 고위층 인사들이 타겟임. 점이나 낙서처럼 보이는 폴록이나 데 쿠닝같은 작품들은 나오는 족족 수십억을 호가하니까 - 이런 작품들은 이렇다 할 척도 없이 기존의 미술 작품에서 얼마나 개념적으로 변화했는지를 두고 가격이 매겨지는데 - dc App
(고위층) 소비자들이 돈을 쏟아붓는 건 어떤 기준에 따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취향, 기호, 재력을 표현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임 - dc App
그러다보니 예술 작품들은 그 표현 기법, 내용, 구도에서 철저히 자유를 추구하는 반면, 상업 예술, 팝아트는 정반대로 (대중) 소비자의 취향을 얼마나 충족하느냐는 단일한 기준에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음 - dc App
대중 소설과 예술 소설의 도식도 마찬가지임. 예상 외로 어지간한 라노벨, 판타지보다 고전 소설의 매출이 높다는 사실을 보면 단순히 예술/대중 소설의 구분은 쉽지 않음 - dc App
자기가 모르는 것을 상상하며 글을 쓰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현대소설이나 읽고 이런 글을 써. 지난 해 이상문학상 받은 작품이 무슨 특별히 예술이더냐? 대중이 못읽을 글이더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