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가가 실험적 자아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
밀란 쿤데라가 정의하는 소설이다. 그는 과학자가 자연을 탐구하고 철학자가 세계를 탐구할 때 소설가는 실존을 탐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소설의 기술>은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 책이다. 7부 동안 그는 소설의 근본, 목적 그리고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은 유럽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기초로 한 유럽 소설이다. 그는 단지 유럽에서 쓰이고 읽히는 소설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형식과 정신을 받아들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소설들을 전부 유럽 소설이라 칭한다.
맨 위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소설을 실존을 탐구하는 매체로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소설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다룬다.
쿤데라는 소설의 시작을 세르반테스로 본다. 즉 그는 돈 키호테 또한 실존을 다룬다는 것인데 쿤데라는 이를 모험과 같은 대서사시 안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실존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형식의 소설은 더 이상 성립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계는 하나로 합쳐지면서 더 이상 모험을 향취를 담은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하나가 된 세계는 인간의 테두리를 더욱 좁게 만들었고 새로운 소설의 탄생을 야기했다.
프루스트는 지나간 과거의 향수를 극도로 섬세하게 불러일으키면서, 조이스는 흘러가는 현재를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자세하게 조명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개척을 시도했다. 문제점이라면 둘 다 개척과 동시에 정점을 찍어버리면서 앞으로의 가능성이 부정되어 버렸다.
쿤데라가 가장 주목한 방식은 카프카와 브로흐의 방식이다. 그는 따로 부를 마련해서 둘을 설명할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을 높게 평가한다.
카프카는 꿈과 현실을 뒤섞는 방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카프카적인 방식으로, 부조리에 휩싸인 주인공과 장막에 가려진 미지의 권력 그리고 이를 주인공에게만 진지한 비극적으로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소설을 만들었다. 브로흐는 소설의 형식을 넘어, 한 주제를 변주하여 다층적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구현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산문, 시, 에세이가 서로 엮이면서 등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인 예루살렘 연설문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격언을 언급한다. 어째서 신은 인간을 보고 웃는 걸까? 쿤데라는 인간이 생각할수록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소설 속에서의 실험을 통해 여러 가능성을 엿볼 뿐이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행위를 방해하는 세 가지 세력을 규정한다. 이들은 아젤라스트,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키치이다. 아젤라스트는 그리스어로 웃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은 소설의 진정한 의도에 공감하지 못하는, 진리가 명확히 고정되어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은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이 뭉개진, 사회를 아우르는 일관된 생각의 멍청함, 무지를 말한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유명해진 키치는 알다시피 고정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쿤데라는 위의 세 세력들을 소설의 본질을 흐리는 존재들이라 본다. 그는 이 세력들에 맞서 소설에 대해 말하기로 생각했다. 실존에 대해 다루는 소설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그는 소설가로서의 일을 수행한다.
소설가로서 쿤데라는 세르반테스로부터 이어지는 실존의 문제를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의 소설들 전반은 이러한 목적에 집중하여 인물들의 실험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는 대중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닌 인간의 근본을 연구하는 소설가이다. 그렇기에 밀란 쿤데라는 현대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이 좀 두서없어졌네.
쿤데라가 위대한작가? ㅋㅋㅋ
그것도 가장?ㅋㅋ
팬심이 심하게 포함되었으니 걸러서 판단하도록
정성추 : '가장 위대한'을 일급의 소설가로 고치면 적절하겠다.
조금 수정했다 ㅋㅋ 다 읽고 너무 뽕차오른 상태에서 써서 그런가 봄
실존주의 이제 좀 한물, 아니 두물 가지 않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