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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을 처음으로 읽어본 것은 몇 년 전, 너무나도 유명한 <호모 사케르>를 집어들었을 때였다. 당시에 <호모>는 참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주제 자체는 꽤나 명확하고 흥미로웠고, 다소 신비주의적인 어조가 섞여 마음에는 들지만 남한테 설명하기는 힘든 책이었다. 다만 좋아하는 책을 고작 이런 정도로 넘기고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아예 참고용으로 다른 책들을 함께 구해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먼저 <호모>가 시사하는 문제점의 유래 및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외상태>, 아감벤의 책들을 번역한 김항 교수가 쓴 <종말론 사무소>, 그리고 아감벤이라는 철학자의 저작 전체를 조망하는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까지. 이를 읽으며 생각하고 나니 확실히 예전에는 일종의 아포리아처럼 생각하며 넘겨 읽었던 것들이 훨씬 더 분명해졌다.



먼저 <예외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은 <호모 사케르>에서 “호모 사케르”와 생명정치에 대한 것은 잠시 뒤로 하고, 이들이 배제됨으로서 포함된다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였는지를 로마법에서부터 근대법까지의 이행 동안 “예외상태”라는 것이 법학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또한 이를 벤야민과 Schmitt가 어떻게 다뤘는지를 통해 이야기한다. 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법률들이 도저히 동작할 수 없는 아노미적 순간들은 늘 존재했고, 로마법은 그 공백을 처리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법률의 의무를 모두에게서 치우고, 모든 상태가 해결된 후 다시 유예되었던 법이 적용되도록 두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법률의 자의성을 감추기 위해, 주권자는 자신의 안에 노모스(법)을 품는다. 그의 지시는 법률은 아니면서도 사실상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법률-의-힘을 갖고, 이 주권자의 죽음은 다음 주권자가 생길 때까지 법을 유예하는 일종의 예외상태가 된다.



이러한 예외상태에 대한 언급이 로마법 내에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롭게 볼 부분인데, 법 밖의 상황을 가정하는 법은 법률 밖의 공백을 법률로부터 배제하면서, 동시에 법 안에 그 공백을 포함한다. 물론, 로마법의 시대에는 이러한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법 밖에 무엇이 있든 어차피 큰 상관은 없었던 탓이다. 문제는 근대법의 시대에 법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며 생겼다. 예외상태라는 아노미는 법과 함께 늘 존재했지만, 이제는 이 폭력을 어떻게든 법 밖으로 내쫓거나, 법 안에 포섭해야만 했다. Schmitt는 후자를 택한 사람으로, 저서 <정치신학>에서 법은 예외상태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하며 주권자가 에외상태를 결정해 이것을 배제하는 식으로 새로운 지시를 내리는데, 이 지시는 법률이 아니지만 법률과 사실상 동일한 법률-의-힘을 가지며 이것은 곧 새로운 법이 된다. 그렇기에 예외상태는 배제되면서 동시에 포함됨으로서 법의 기초가 되며, 주권자는 어느 것이 예외상태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법을 만든다.



벤야민은 이러한 Schmitt의 주장에 반대했는데, 도저히 주권자가 자신의 안에 예외상태를 품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탓이다. 벤야민과 Schmitt의 학문적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깊게 얽혀 있고, 두 사람은 차이는 바로 이 예외상태와 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에 있다. Schmitt가 주권자가 에외상태를 법과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과는 달리, 벤야민은 반대로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닌 유예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주권자가 결코 예외상태를 매개할 수 없다고 믿었다. 저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이 바로크적 비극의 원천은 주권자가 저 예외상태가 이곳에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음에도 결코 이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하며, 영웅적 비극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는 신화적 폭력과는 달리, 신적 폭력은 그러한 법과의 관계에서 무관하게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일종의 예외상태라는 점에서 Schmitt가 시도하는 기획이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 주권자는, 그 자신만만함과는 달리 결국 다른 이들과 동일한 피조물로서, 예외상태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호모>로 돌아가자면, 아감벤은 생명정치가 포획하고자 하는 그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법에 포획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단순한 살아있음과 이상적인 삶을 서로 다른 용어로 부른 것에서 시작해 법으로 구성되는 국가에 포함된다는 것은, 동시에 이러한 삶에서부터 배제되는 순간 단순히 살아있음 이상의 아무 것도 갖지 못하는 벌거벗은 인간(“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며, 그러한 전제를 두는 법이 예외에 대한 자의적인 대처를 말함으로서 일종의 랑그로서 존재하며, 언어가 랑그 밖에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며 우리의 삶을 언어 속에 속박하듯 법 역시 이 자의성과 함께 무의미하지만 지속되는, 카프카 식의 삶이 된다. 곧, 벤야민이 생각하는 법을 종료시키는 신적 폭력은 그러한 삶으로서의 법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며, 존재 이유가 사라진 국가들의 시대에서 그 메시아 도래 이후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무의미한 법이 삶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삶이 되어버린 국가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국가에서 주권자와 호모 사케르는 서로 반대편에서 예외상태를 이룬다. 주권자가 국가 내부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면서도 국가 체계 외부에서 힘을 휘두르듯, 호모 사케르는 국가 외부에 있는 것처럼 취급되면서도 내부에 존재한다. 이 내부에 있는 외부인은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개념으로, 자유주의의 인권이라는 것이 기실 한 국가의 시민권을 돌려말하는 것에 불과했던 기원에서부터 국민이란 어떤 국민성을 만족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선택적이지만 강력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생명정치의 발전으로 어디부터가 죽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산 인간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한 것과도 맞닿아 있으며, 분명히 나라의 국민이지만 “국민”은 아닌 국가 내부의 거주자들은 어떤 “신성한”, 체제 바깥의 존재로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 생사여탈권에 가까운 주권자의 힘은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의 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국가 그 자체에 더 가깝고, 그것은 국민을 정한다. 그러나 주권자에게 비국민으로 정의된 이들에게서 그 자체로 달라진 것은 없기에, 그들의 "신성함"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이 생명정치적 근대국가 속에서 살며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함"은 이렇게 운명처럼 문을 두드리는 주권자에 의해 호출된다. 나치 독일에서 당대 학문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던 다양한 정책들이, 실제로 국민들을 신체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시행되었듯.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이지만, 당대 최신 학문과 사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던 나치 독일과 근대국가를 떼어놓고 보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많은 반대를 불러 일으킨 장애인 및 정신병자 안락사 프로젝트가 시행된 이유는, 60년대 북유럽에서 우생학적 중절 수술이 이뤄진 것과 조금 다르면서도 의도는 동일하다. 이것이 모든 것을 품고 후견하려는 국가의 원형이다.



예전에 애석하게 느낀 점은 역시 아감벤의 비판과 사유가 상당히 혼잡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바타유의 글들이 문학적인 것을 문학이 아니어야 하는 곳에 너무 들고 온다고 생각해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점에서는 아감벤이 한 술 더 뜨면 더 떴지 덜하지는 않다. 정치철학적인 테제들은 대체로 맥락에 가까운 형태로만 사용되며, 그나마도 언어철학과 문헌학이 고개를 들이밀며 약간은 자의적으로도 보일 법한 텍스트 해석이 덧붙여질 때면 이것을 흥미 차원 이상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호모 사케르와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핵심이 아니라, 이 주제가 나온 맥락, 예외상태와 법의 근간에 대한 20세기의 치열한 논쟁이 핵심이겠다, 하고. 



사실 <호모>의 주제 자체로는 푸코의 생명정치가 조금 더 연장된 것 이상의 의의를 찾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비록 아감벤 본인이 초반부에서 역설하듯, 푸코와 아렌트가 서로의 학문적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이 수용소와 호모 사케르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라고 자진납세하지만, 굳이 그걸 위해 이 난해하게 겹싸인 형식과 다양한 분야의 문헌 및 비평을 들고 오는 글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리 좋은 변명이 되지는 못할 테다. 다만, 다시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읽는 순서가 따로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2부 격인 <예외상태>, 1부 <호모 사케르>에서 2장-1장-3장 순서로 읽는다면 그리 난해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비로소, 이 다양한 분야들에서 고개를 내밀어 한 마디씩 하게 만드는 아감벤의 글의 매력을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왜 이런 순서가 되어야 했을까? 그건 참 의문이다. (어쩌면 아감벤이 자신의 급작스러운 유명세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P. S. 미루고 미뤄왔던 Schmitt를 이제 정말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정치신학>과 <독재론>, <대지의 노모스> 정도면 충분하리라 믿고 도서관을 뒤져본다.



P. S. S. Schmi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