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와 화자 사이의 간극이 필수적이다. 즉 작가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전지적으로 본다고 가정된 화자와 다르기 때문에 '전지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형용모순이 된다. 어떻게 전지적인데 분열될 수 있지? 따라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견지하는 초월적 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중립적 관점도 불가능함. 중립적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규범적 중립성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렇게 볼 수 있다고 가정된 것 뿐 아닐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청되는 것이다. 즉 사실이 아니고 요청되는 당위, 그러므로 가치판단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전지적으로, 초월적으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 그 자체를 요청하는 것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 또한 요청되는 것이지 사실이 아니다. 소설에서 리얼리티를 느끼든 형이상학으로부터 현학적 성찰을 얻든, 그것은 사실에 대한 요청에 의한 가상일 뿐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사실에 다가갈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형식이다. 사실이 부재함에도 그에 대한 일련의 형식을 통하여 부재하는 그것(사실)을 소급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사태의 전말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억압된 것의 회귀가 뜻하는 바 아닌가? 즉 억압된 적이 없다. 억압된 것은 억압 이후에 발생한다. 따라서 사실은 그것(사실)의 형식, 그러므로 사실 자체의 내적 간극이며 이러한 간극(에 대한 요청) 없이는 우리는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 믿음과 이성이 상보적인 관계인 이유이다. 믿음은 이성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