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상 받을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서부극은 이미 지나가고 만 장르일까. 사실 서부극 소설을 읽어 본 적이 거의 없는 지라, 영화로 설명을 대체해야 할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시작해, 바로 이 <모두 다 예쁜 말들>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또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최근에 본 <퍼스트 카우>, <파워 오브 도그>등의 인상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서부극이 이미 끝났다고, 그렇기에 새롭게 서부극을 재조합하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록 서부극은 단순히 이미 죽어버린 장르가 아닌, 현 시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장르로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니, 서부라는 광활한 배경을 토대로 수많은 사람을 스쳐가는 여정이라는 소재가 마치 사람의 삶을 한 편의 외로운 여행에 비유하는 듯한, 여전히 흥미로운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의 배경은 1949년이다. 서부극에서 다루는 시대적 배경이 보통 1860년대 남북전쟁까지임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더 나아가 1949년의 시점에서 이미 미국은 개척을 전부 완료하고 두 번의 세계대전까지 거쳐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지위를 휘두르고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배경은 서부극과는 이상하리만치 동떨어진 배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서부개척시대를 아직도 열망하는 두 명의 어린 카우보이는 미국에서 도망쳐 멕시코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1949년의 멕시코의 풍경은 이미 지나가버린 서부개척시대 미국의 대체적인 풍경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코맥 매카시의 정체성은 미국 작가이며,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미국 소설이며, 더 나아가서 작품 내에서도 말하듯이 미국인들과 멕시코인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점이다. 존 그래디 콜과 롤린스는 라 푸리시마 목장에 백 년이라도 머무르고 싶다고 얘기하였으나 그들이 결코 그곳에 있을 운명이 아닌 이유이다.
존 그래디 콜과 롤린스는 멕시코로의 여정 도중에 블래빈스라는 의문의 소년과 만나 그와 동행하게 된다. 온통 이해하기 어렵고 대화조차 제대로 안 되는 블래빈스와의 여정에서 알 수 있는 그의 행동 원리 중 하나는 소유권에 대한 강한 의지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그의 말, 그의 총을 찾겠다는 생각만으로 블래빈스는 마을에 쳐들어가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존 그래디 콜과 롤린스는 블래빈스의 그러한 행동에 고개를 젓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였고 끝내 그의 죽음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존 그래디 콜과 롤린스가 목장에서 일한 방식 또한, 말을 체계적으로 길들이고 좋은 말들과 나쁜 말들을 구분하는 일들이었다. 이는 지천에 널려있는 무작위와 무위를 규율화하려는 이성적인 작업이다. 억지스러운 주장이긴 하지만, 블래빈스의 사고관처럼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따로라는, 소유라는 개념 또한 이런 규율의 일부라고 한다면, 작중 등장하는 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이성적 사고관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람 안에 악한 면이 있을 수는 있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악이 아니야. 어디서 악을 구하겠나? 대체 무슨 수로 그게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나? 말도 안 되지. 멕시코에서 악은 실재하는 존재야. 제 발로 걸어다니지. 언젠가는 자네한테도 찾아올 거야.-p.269
인간은 어디에라도 책임을 지우기 마련이야. 그것이 본성이지. 우리는 작업대 쟁반에서 금속 덩어리를 하나씩 집어드는 안경 낀 동전 주조사와 같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어. 작업대 밖에는 어떤 혼돈도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서 빈틈없이 일에 몰두하지.-p.333
그런 데 반해 존 그래디 콜과 롤리스가 감옥에서 만난 거물 페레스의 말에 따르면, 멕시코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돈에 더러움과 깨끗함 따위는 없고, 미국인들의 생각은 비실용적인 미신이라고. 사실, 내가 처음 코맥 매카시의 관점을 접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이 부분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의 행동들. 분명 사이코패스 악한임이 분명한데도 동전을 던지며 자신의 살인은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그 아이러니함.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전환할 필요성까지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평소 우리의 공정한 평화로운 삶에 불공정한 요소인 악인이 개입해 어지럽히기 때문에 이를 처단해야 한다고 믿지만, 사실 악은 아주 공정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존재했다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 마치 존 그래디 콜이 멕시코 소년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의 심장을 칼로 후비는 선택을 했듯이. 즉, 삶은 근본적으로 모든 걸 계도하려는 인간의 직관적 이성에 반대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이러한 지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생각나기도 한다. 기본적인 물리법칙조차 그 비직관성 때문에 얼마나 초심자들을 괴롭히는가). 두에냐 알폰사가 알레한드라에게 그녀 자신이 되라고 얘기하곤 끊임없이 본인의 말을 따르게 유도하듯이. 또 알레한드라가 존 그래디 콜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얘기하면서도 떠났듯이.
알레한드라가 떠나자 존 그래디 콜은 아주 이상한 결정을 한다. 블래빈스가 그랬듯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신의 말을 찾으러 온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존 그래디 콜은 미국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를 몸으로 체험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이성적 사고 방식을 실천하기 위해 총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이전에 자신이 그토록 거부했던 거짓말을 하는 일도 꺼리지 않는다. 그렇게 미국으로 넘어간 존 그래디 콜은 판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판사는 스스로에게 의심을 느끼는 존에게 어떤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 용기는 스스로의 행동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결하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서의 자신을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용기이다.
재미있게도, 판사가 아님에도 판사라 불린 <핏빛 자오선>의 홀든과는 정반대로, 이 판사는 판사가 되고 싶지 않았음에도 판사를 한다. 어쩌면 <모두 다 예쁜 말들>은 <핏빛 자오선>의 반대편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어떤 노력의 결실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 롤린스에게 말을 돌려준 존 그래디 콜은 장례식을 거쳐 새로운 나라로 향한다. 블래빈스의 말의 주인을 찾아준다는 일념 아래에. 서부시대의 미국을 닮은 멕시코를 떠나, 그리고 지금 이곳의 현재의 미국을 떠나, 미래의 미국을 향해. 그는 어디론가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를 살펴보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알고 그럼에도 미국의 소중한 가치를 간직한 채 미래를 집요하게 물어보고 있다. 그렇기에 매카시는 서부극을 썼다.
존나 두서없이 씀 ㅈ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