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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당하기 싫으면 돌아가시오--
"For all his dedication there were times he thought the fine sweet edge of his grief was thinning. Each memory but a memory of the one before until. . . What? Host and sorrow to waste as one without distinction until the wretched coagulant is shoveled into the ground at last and the rain primes the stones for fresh tragedies."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섬세하고 달콤한 비탄의 날끝이 무뎌지는 때가 있다고 바비는 느꼈다. 각각의 기억은 그 전 기억의 기억일 뿐이었고 결국...무엇일까? 슬픔과 그 당사자가 구분되지 않은 하나로 되어, 그 비참한 덩어리가 마침내 땅에 파묻힐때까지 스러져갔다. 그리고 비는 새로운 비극을 위해 석반을 닦아낸다.
1. 전체적인 서사와 주제
매카시의 마지막 역작 <승객> 은 본질적으로 비탄Grief 에 대한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빙글빙글 방향성 없이 움직이는 서사는 자살한 여동생 알리사를 애도하는 주인공 바비의 정서와 정신의 연장선이며, 혹자는 서사 전체가 자동차 사고를 당한 바비의 주마등이 아니냐는 추측마저 내놓았다. 그렇게 극단적인 추리까지 하지 않더라도, <승객> 의 서사는 분명 답답하다고 여겨질 구석이 많다. 카프카의 <성> 이나 <소송> 이 연상되는 거듭되는 조직적 부조리의 압박이 그 예시이며, 이것에 저항하지 못하고 음모론적인 이야기 사이를 방황하는 주인공 바비 웨스턴은 핀천 소설의 주인공 같기도 하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실종된 승객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바비를 쫓는 코트 입은 인간들이 누군지는 막연한 짐작 외에 애초에 유추가 불가능하다. 요약하자면 기존의 매카시 소설의 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데, 비록 부조리에 고통받는 주인공을 매카시가 그려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르웰린 모스가 바비와 서사적으로 비슷한 구도 속에서 움직이고, 초기작 <신의 아이> 나 <서트리> 에서 사회를 거부하듯 방랑하는 레스터와 서트리 또한 바비의 일부를 형성한다>, <승객> 의 바비 웨스턴이 돋보이는 점은 이런 답답한 방랑이 서사가 종장을 찍을때까지 해소되기는 커녕 그 이유마저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스페인의 이비자 섬을 배경으로 하는 마지막 장은 언뜻 서정적이지만 그 어떤 종결조차 맺지 못하는거처럼 보인다. <핏빛 자오선> 처럼 악이 완벽하게 승리하거나 반대로 <모두 다 예쁜 말> 처럼 소년 찬가와 성장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더 로드> 에서 비추어진 생명의 희망이나 <신의 아이> 처럼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도 딱히 없다. 단지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해온 잔잔한 비탄함을 이어가며 끝내는데, "죽는 날에 그녀 (알리사) 의 얼굴을 볼 것을 바비는 알았고" "어둠 속으로 그 아름다움을 가져가기를 희망하는 그" 가 "세상의 마지막 이교도" 라고 말하는 마지막 문장은 언뜻 퇴행적이기 까지 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비탄의 이면에는 지독한 고독과 원시적인 실존이 있으며, 이는 다시 카프카적인 비유를 끌어오자면 K. 나 시골 의사의 최후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부조리를 이겨내지 못하며 그 기억과 함께 녹슬어가는 바비는 "개 같군!" 을 외치며 처형당한 K. 나, "속았다! 속았다! 야간 사이렌에 현혹되면-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를 외친 시골 의사와 다르지 않다.
2. 지성과 정신, 그리고 광기와 폭력
그러나 이러한 퇴행적인 결과에 머물기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그 과정을 살펴보자 한다.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그 퇴행이 결과의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승객> 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리학 이야기다. 바비와 알리샤의 아버지는 오펜하이머를 도와 원자탄을 개발한 과학자였으며, 카레이서이자 잠수부인 바비는 한때 칼텍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또 알리샤는 12살에 시카고대에 입학한 천재 수학자로, 그 천재성이 그녀의 광기의 이면이라는 점이 꾸준히 강조된다. 단순히 인물 설정을 넘어서, 바비가 잠수 일을 같이 하는 동료에게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단언컨대 독자 대부분이 아예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 거의 반 장에서 한 장을 통째로 잡아먹는 것은 소설의 미적 가치를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지성 혹은 지식에 대한 집착은 <승객> 의 주제에 있어서 핵심적인데, 바비가 그리워 한 여동생 알리사가 조현병에 시달리다 자살한 이유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깨달았던 거지. 결국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그림 몇 폭을 그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벽에 그려진 황소나 미분 방정식, 그게 다 다를 바가 없던 거야." 라고 말해지는 알리사의 절망은, <승객> 을 매카시 문학의 한 부분으로 완성시킨다. 알리사는 큰 틀에서 <핏빛 자오선> 의 소년처럼, 또 <노인> 의 르웰린처럼, 세계의 혼돈과 그 무정한 악함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단지 그 과정과 멸망을 총포와 폭력 등 '몸의 서사' 로 그려낸 매카시의 전작들과 다르게, 정신증과 환각, 그리고 학문, 말하자면 '정신의 서사' 로 풀어낸 결과물이 <승객> 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이 학문이라는 도구의 악함을 매카시는 말하는데, <핏빛 자오선> 에서 인간 이성과 폭력의 동일함을 판사를 통해 표상한 것과 같이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악한 이면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으로 드러낸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481377
코맥 매카시가 하는 원폭 묘사개중에는 히로시마를 탈출해서 나가사키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사하길 바라며. 그들은 제시간에 도착해 불타 죽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과학자들과 함께 그곳에 갔다. 내 부친. 그는 모든 것이 녹gall.dcinside.com묘사가 길어서 링크로 대체
결국 총포로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다 몰락한 소년이나, 자기 지성의 폭력에 맞서다가 스러진 알리사는 모두 매카시가 말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허망함을 표상하고 있다. 또 인간의 죄 또는 원죄를 말하는데, 원자폭탄을 개발한 과학자 아버지의 죄는 그 학문으로 인해 미쳐버린 알리사에게 물려지고, 또 그런 알리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비에게 다시 내려온다. 그런 점에서 <승객> 은 매카시가 "소년은 남자의 아버지" 라고 말한 <핏빛 자오선> 시절의 본인으로 돌아간 듯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한 퇴행과 부조리하고 이해 할 수 없는 결말은, <핏빛 자오선> 에서 판사가 추는 춤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그 정서의 진폭이 좁아진 것이며, 그에 따라 문체나 서사적 표상이 신체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에서 정신적이고 내밀한 고통으로 옮겨간 것이다.
3. 근친상간, 무력함, 죄책감
다시 바비로 돌아가 보자. 바비와 알리사의 관계는 앞서 말한 몸과 정신의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이 구도를 살펴봄에 따라 바비의 비탄함은 조금 더 해명되고, 그가 느낀 무력감 또한 조금 더 명확해진다. 앞서 말했듯 알리사는 다분히 정신적인 인물인 동시에 여자이며 소설 시점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다. 말하자면 원래 매카시 소설의 주인공인, 당장의 세계와 맞서는 남성적인 '몸' 의 인물과는 대척점에 놓여있다. 이런 전형적인 서부극적 인물의 자리는 바비가 차지한다. <승객> 은 어찌보면 알리사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혹은 알리사를 추억하는 바비의 이야기라고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현재에서 바라보는 과거, 또 몸에서 바라보는 정신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바라봄은 한없이 무력한데, 알리사의 죽음을 바비가 그토록 이겨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무력함–-과거를 어루만지지 못하는 현재의 비탄, 또 정신을 따라서 녹스는 몸--에 있다. 바비는 알리사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후술하겠지만 자신이 그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바비와 알리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소설 후반부의 암시에 따르면, 알리사는 바비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도로 낙태했고, 이것이 알리사가 조현병에 시달리며 보는 환각의 주 등장인물, 마치 유산된 태아가 그대로 자라난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탈리도마이드 소년' 의 주된 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 알리사의 정신의 피조물은, 어째서인지 작품 후반부에 바비에게 강림한다. 마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에서 묘사된 사탄처럼 능글맞게 바비를 조롱하는듯, 회유하는 듯 하다. 그런 탈리도마이드 소년이 폭풍이 몰아치는 해변가 너머로 사라질 동안 바비는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미국 서부의 오지를 따라 방황을 재개할 뿐이다.
다시 맨 처음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면, "슬픔과 그 당사자가 하나가 되어" 땅에 묻힌다는 것은, 마치 알리사의 죽음 이후 그곳에 완전히 갇혀 마치 죽어버린 알리사와 하나가 된 듯한 바비의 모습이 연상된다. 말하자면 정신과 몸이 서로 다르지 않아, 한 쪽의 멸함이 다른 쪽 또한 파멸의 길로 이끈 듯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몸과 정신의 샴쌍둥이적인 구도는 카프카의 <변신> 을 연상시키는데, 마치 처음에는 몸만이 벌레였던 그레고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까지 완전히 벌레로 변태한 것처럼, 본디 삶을 살아가던 바비가 알리사가 죽은 이후로 점점 알리사의 절망을 닮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따라서 바비의 몰락은 알리사의 몰락이고, 인간 지성의 몰락이며, 신체의 몰락이고, 그 많고 허무한 역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비탄이라는 감정밖에 남지 못하는 것이다.
Host and sorrow to waste as one without distinction 이 부분 해석이 어떻게 되나요 to waste?
스러진다, 멸한다, 그런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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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미번역일텐데
뭐야 미번역은 참가 안되는 거였네
글 내리기 싫어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