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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어떤 수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규율성을 지닌 하나의 사조가 아닌, 카오스적이라고까지 하고 싶은 포스트모던 예술의 면모들을 확인하면 특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적 미에서 점점 멀어져, 어떤 허무와 무위의 늪 속에 깊이 빠져버리는 느낌까지도 때때로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 아주 훌륭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들의 경우 오히려 그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 나에게 하나의 가능성마저 제시해 주는 것 같은 더 큰 희망을 느끼게 했다. 보석 가게에서 보는 진주보다도 진흙탕 개뻘에서 찾은 진주가 훨씬 빛나 보이듯.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그런 아름다운 희망을 위해 스스로 개뻘을 휘젓고 다니고자 한 용감한 예술가들이 선택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토마스 핀천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내게 그런 작품이었다.
토마스 핀천은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중에서도 난해한 이야기를 하기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의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도서관에 문득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이 <제 49호 품목의 경매>가 있음을 확인하고 홀린 듯 집어들게 된 것도 아무 이유가 없는 일은 아니었으리라. 방금 <모두 다 예쁜 말들>을 빠른 속도로 다 읽었기 때문에, 심지어 작년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나를 끙끙 머리싸매게 했던 <핏빛 자오선>의 코맥 매카시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제 49호 품목의 경매>도 잘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고, 처음에는 살짝 애먹을 뻔했지만 궤도에 오르니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오히려 복잡한 설명과 엄청난 정보량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괴상한 그 괴리감 덕분에 더 흥미로워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힘들어할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의 친절한 해석까지 꽤 긴 분량으로 삽입되어 있다. 그 해석의 내용에 많이 공감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얘기도 해보고 싶다. 나는 영화에 대한 영화를 좋아한다. <클로즈 업>이나,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내게는 크게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 느껴졌고, 최근까지 오면 <파벨만스>나 <애프터썬>도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이런 영화들을 좋아하는 건, 자신의 업무에 대한 그들의 프로로써의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설에 대한 소설은 어떨까? 나는 <제 49호 품목의 경매>가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주인공 에디파가 메츠거와 함께 호텔 방에서 영화를 보던 장면을 읽으면서부터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츠거는 전직 아역배우로, 자신이 찍은 영화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과거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에디파와 내기를 하며 영화의 내용이 소설의 진행과 엮이는 순간, 소설이라는 극 내 극중극인 영화는 픽션 속의 픽션이라는 이중의 틀 중 하나를 깨고 마치 소설과 동시에 진행되는 듯한 긴장감을 독자들에게 준다.
말, 누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쓴단 말입니까? 말은 단지 파티를 즐겁게 하거나 배우의 두개골 경계선을 지나 기억장치 부근에 도달하는 데 사용되는 기계적인 소음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실체란 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법이에요.
하지만, 예술이 곧 정답이라고 쉽사리 외칠 수야 없는 법이다. 그 전에 먼저, 영화로 먼저 접한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니 <제 49호 품목의 경매>와 그 작품 둘 다 일종의 비틀린 추리 소설, 혹은 탐정 활극과도 같은 독특한 플롯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두 소설은 결국 모종의 수수께끼를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둘 다 그 수수께끼가 무엇인지가 중요하기보다도, 그 수수께끼를 어떻게 찾아가는지가 중요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제 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이 수수께끼를 찾아가는 과정은 망상을 통해서이다. 때로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음모론적인 이야기와 과잉 정보, 그리고 과대망상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어 독자들을 혼란시킨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소설의 과잉적인 특성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그렇기에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그 생생하게 벗겨진 풍경에서부터 독자들이 직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체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들 각자가, 에디파가 트리스테로를 찾아가듯이, 각자의 상상으로 현대라는 무의미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 환상을 소중히 간직해요. 달리 당신이 가진 게 없지 않소? 환상의 작은 촉수를 꼭 움켜잡아요.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당신을 꾀어 그것을 없애 버리거나 약사들이 독약으로 그것을 제거하게 하지 말아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소중히 간직해요.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 때 당신은 그만큼 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쉬우니까 말이오. 당신은 그 순간부터 아마 존재하지 않게 될 거요.
물론 그 도중에 스스로의 상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포기할 수도 있다. 모든 것에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쉽게 살아갈 수도 있다. 정말로 우리의 삶은 "죽어 가고 있는" 삶이고, 죽고 나면 우리가 가졌던 재산도(어쩌면 이렇기에 이야기는 상속 문제에서 시작되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도 관계도 마음도 모두 천천히,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떻게 생각해보면 처음에 말했던 짙은 늪과 같아 빠져 나오기 어려운 생각이다. 에디파를 만났던 남자들, 무초, 메드거, 힐라리어스, 드리블레트는 , 또 인버라리티도 그렇게 무의미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거짓말같은 상상으로 그들의 죽음이라는 무의미에 대항해, 우리만의 실체와 의미로 그들의 존재를 우리 안에 붙잡아두어야 한다고 토마스 핀천은 강력하게 얘기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픽션이 픽션인 줄로 알면서도 실재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믿고 싶게 되는 마음의 근원이고, 또 소설가들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라고. 그리고 우리는 에디파처럼 이 이야기들의 경매장에 기다려야 한다. 그 픽션이 정말로 무의미를 견뎌내려는 강력한 몸부림의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라고 믿고, 그 가치를 당당히 부여해 주어야 한다.
명백한 것들 뒤에는 또 다른 형태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에디파가 진정한 편집증의 빙글빙글 도는 희열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진짜 트리스테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국의 외형 뒤에 트리스테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사실은 그저 미국만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일 그저 미국만이 있을 뿐이라면, 트리스테로와 관계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소외된 사람으로서 편집증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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