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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독갤에서 추천받은 책인데, 아무래도 난이도가 좀 있어 보여서 다른 책을 먼저 보고 이제서야 읽었다. 덕분에 내가 산 책은 벌써 구판이 되었음... 그래도 책은 대만족이다. 아주 탁월한 추천이었음...



먼저 이론적 분석이 매우 훌륭하다. 이 책은 왜 이런 번역이 바람직한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많은 번역 학습서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다른 책들도 훌륭한 번역 요령을 많이 알려주지만, 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지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짧막한 문법 지식에 의존하거나 모국어 감각에 호소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학 이론과 영문법-국문법 사이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가 영국에서 번역학 학위를 받아 왔고, 한국에서도 번역 실무와 번역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굉장히 신뢰가 가고 설득력 있다고 느껴진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문단 단위 번역 전략(책에서는 담화 단위라고 씀)에 있다. 사실 이론 설명이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무슨 번역학 공부하려고 산 책도 아니고, 요령만 잘 배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단 단위 번역팁은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적어도 내가 읽은 번역 교육성 중에서는) 여기서 문단 단위란 "전체 맥락을 파악하고 맥락에 맞게 번역해라~" 따위의 흔해빠진 조언이 아니다. 저자는 영어 텍스트의 정보 배열 구조와 한국어 텍스트의 정보 배열 구조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둘 사이를 오가는 전략을 설명해준다. 다시 말해, 각 언어의 작문 원리를 비교하고 한국어 작문 원리에 맞춰서 원문을 재구성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여기서 특히 유익했던 내용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문미 초점 원리와 표층 결속성이고, 둘째는 화제어이다.


영작문 원리 중에는 문미 초점의 원리라는 게 있다고 한다. 전달하는 정보가 이미 주어져 있는 구정보냐 새로 등장한 신정보냐에 따라 정보성의 차등을 두고 신정보를 뒤로 몰아 넣는 영작문 원리를 말한다. 또 이 문미 초점 원리는 문장과 문장이 결합하면서 표층결속성을 이뤄낸다고 하는데, 간단히 말해 앞문장의 (구정보)+(신정보)에서 (신정보)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음 문장에서 (구정보)로 받으면서 글의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하는 식이다. 일반 문장에서는 지시어, 대명사 등의 대체어, 접속사 등과 함께 사용하면서 표층결속성을 이룬다. 이런 문미 초점 원리와 표층결속성은 글의 흐름을 만들고 독자의 집중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초보번역가는 이 원리를 번역에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법적 지식에 따라 영어 문장을 번역을 하다보면 (구)+(신)순의 문장을 (신)+(구)순으로 번역하기 쉬운데, 이렇게 되면 문장 단위로는 올바른 번역이 되겠지만, 문단 단위로 보면 정보배열과 표층결속성이 깨져서 난잡해게 느껴지는 글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가는 (구)+(신) 순의 배열을 깨드리지 않으면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순차 번역을 연구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원리를 강조하면서 순차번역을 위한 팁을 여러가지 주고 있다. 아마 이런 지식과 요령은 다른 책에서 배우기 힘들 것이다. (김보원의 <번역 문장 만들기>에서도 순차번역을 소개하기는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모국어 감각에 호소할뿐이다.)


하지만 이 순차번역만으로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힘들 다는 것 같다. 한국어에는 '화제어'라는 또 다른 문법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화제어는 보통 '~은/는'을 붙여 만드는데, 이게 영어에는 없고 한국어에는 있는 독특한 문법 요소로 텍스트에 일관성을 부여한다고 한다. 한국어는 이 화제어를 사용해서 화제-논평 순으로 정보를 배열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에서 핵심이 되는 화제어로 선정하고 그 뒤로 새로운 정보(논평)을 나열하는 식으로 정보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영어와 큰 차이를 만든다. 영어에서는 화제어가 없는 대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어순'을 통해 특정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어순을 중심으로 쓰여진 영어 문장을 화제어 중심인 한국어로 옮긴 때에는 한 문장 내에서 주어와 목적어를 뒤바꾸거나 여러 문장들의 순서를 뒤바꾸면서 화제-논평 구조로 재배열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 때 있던 문장을 빼야 할 수도 있고 새로 문장을 추가해 넣어야 할 수도 있다. 이를 번역가의 과도한 개입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 담화 구성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이 '번역'이란 행위의 목표에 부합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아무튼 존나 어려운 듯.


이런 내용은 아예 처음 들은 것들도 있고, 한국어 화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왜 그렇게 사용하는지 모르던 언어현상을 설명하는 지식도 있어서, 번역 공부와 별개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쾌감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어떤 번역 교육서에서도 배울 수 없는 내용이랑 매우 유익했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책은 아니었다. 우선, 문장 단위 번역 파트가 빈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문단 단위 번역에 초점을 맞춘 책인지라 문장 단위에 150페이지 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다른 책들이 문장 번역에만 300페이지를 쓰는 것과 비교하면 많이 적은 분량이다. 물론 이 책에서만 배울 수 있는 번역 요령도 있고 이론적 분석도 매우 유익하지만, 절대적인 분량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김보원의 <번역 문장 만들기> 같은 책으로 따로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다른 단점은 이 책의 조언이 굉장히 수준 높은 작문능력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문단 단위 번역 파트에서(특히 화제어 파트에서) 저자는 텍스트를 분석하고 한국어 정보 구조에 맞춰서 재구성하는 전략을 소개하는데, 이때 텍스트를 반쯤 수정하거나 문장의 순서를 뒤바꾸는 등 창작에 까가운 기예를 보여준다. 거의 번역 차력쑈... 이러한 번역가의 개입이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 굉장한 작문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는 예시 문단 한두 개 읽어가지고 배울 수 있는 능력도 아닌 것 같고, 이 책에서 다루는 '번역 기술'을 한참 넘어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글쓰기 실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소린데, 이 부분은 영 자신이 없다. 따로 공부가 필요한 부분인 듯



<갈등하는 번역>은 무척 유익한 책이었다. 아쉬운 점이야 다른 책으로 메우면 그만이고, 난이도도 조금 높지만 그건 내가 공부하면서 극복해야 할 영역이 것 같다. 여러 차례 재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직접 번역할 때 써먹어 보려고 노력해야 겠다. 나는 구판으로 읽었는데, 조만간 신판을 새로 구해다 다시 읽으면 좋을 듯... 내가 나름 번역에 로망이 있어서 번역 학습서를 조금 찾아봤다.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 <번역의 모험>, 이강룡의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김보원의 <번역 문장 만들기> 정도 읽어 봤는데, <번역 문장 만들기>랑 이 책, <갈등하는 번역>이 투탑으로 뽑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