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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문제다, 돈은 괴물이다, 하는 말을 들으면 으레 말도 안 된다는 양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회에서 견실하게 돈을 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괴물에 잡아먹혔느냐?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잊어버린 것이 하나 있는데, 이들에게서 돈은 흘러가는 것으로, 들어온 만큼 많은 양이 나가며 그 과정에서 고여 있는 돈은 그저 고여 있을 뿐, 그 자체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채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든 바닥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 돈, 무력화된 돈이다. 교환되지 않는 돈에는, 아무리 그 액수가 높더라도, 마력이 없다. 이 굳어진 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돈이 진정으로 괴물이 되며 문제가 되는 순간은 돈이 없어졌을 때조차 아니다. 이는 원인을 제공한다. 문제는 우리가 돈을 깨우는 순간에 있다. 잠들어 있던 돈을 깨우며 이 돈에 올라타 다른 돈들이 활개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들어가는 순간, 다리 아래에서 꿈틀대는 돈은 액수와 무관한 괴물이 된다.
현재의 주식 시장에 익숙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는 이미 무관할 정도로 거리가 먼 이야기겠지만, 지금과 같이 무제한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과 그에 대한 반응, 그리고 이를 예상하고 미리 점해져 있던 돈과 그것을 나중에 가져가려고 하는 약속 따위를 반영하는 시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유럽의 주식 시장은 흔히 버블의 광기라고 부르던 시절에조차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고, 이렇게 다양하지도 않았다. 세계에는 늘 저 바깥, 거래 대상이 되는 바깥이 존재했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오랜 기다림의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배가 돌아온 순간.) 그러나 현재 세계 시장에는 놀라울 정도로 바깥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순간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돈이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을 이해한 이에게는 그 즉시, 자신이 지금 거두지 못한 수많은 기회비용이 마치 부채처럼 내려앉는다. 돈은 형태를 가진 괴물이 아닌, 그 형태들이 비어 있는 거대한 공허의 형태를 취한다.
<인버스>는 이 무한한 가짜 구멍 속에서 "시속 2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투자자가, 구멍에 빠지거나 빠지지 않는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인버스>는 이 구멍의 언저리에서 저 바닥도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빠져버린 이들을 멍하니 지켜보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들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유예된 죽음을 지켜보는 다른 투자자들은 자신이 돈에게 고발당하지 않았음을 느끼며 안도감을 가지면서도, 정말로 그래도 되는지를 묻는다. 정말로 안심해도 되는 걸까? 돈에 의한 죽음은 지켜보는 이에게 너무 끔찍하게도, 단숨에 끝나지 않는다. 이 공허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천천히, 이를 어떻게든 해결해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자신의 사회적 삶을 내려놓고 두 번째 삶을 가지려 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그와 함께 자신을 지탱해보려고 하고,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따금 그렇게 가속도를 줄여나가다 구멍의 벽에 붙어 죽음을 결정적으로 유예하는 데에 성공하기도 한다. 삶이 되어버린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인버스>는 <빅쇼트>가 아니다. 이 떨어지는 이를 지켜보며 마저 달려나가는 이에게는 종교적인 숭고함이 있다. 인간의 시각을 잃어버린 이는 더 이상 어떤 관점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아무런 이유 없는 불운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인버스>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듯, 욥기의 그 모든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불운에 처한 이들을 그저 불운에 처한 이들로 이해하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가장 인간적인 이로서 그 모든 이유를 이해하고 용서해주거나, 혹은,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그를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서 사용해야만 한다. 마몬을 섬기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 가장 드높은 신앙의 순간, 야훼를 섬기는 자가 응당 그러해야 하듯 욥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해의 형태는 결코 야훼가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인버스>의 주인공은, 야훼와 맘몬 사이에서 그 어느 쪽도 웃어주지 않을 질문을 던진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이 된다면 내 행복은 나쁜 걸까?"
야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너와 그의 불행은 네 평가와 무관한 나의 몫, 그 모든 삶을 품고 있는 나의 평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일축할 것이다. 맘몬 역시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네 행복은 행복일 뿐, 네 행복과 그의 불행을 합친 것 중 어느 쪽이 크든 그것은 나의 몫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 <인버스>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화자는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금전적인 면모가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스스로를 인식하며, 서서히, 이 질문을 포기한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럼 야훼의 몫일까, 마몬의 몫일까? 양쪽 다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몫일까? 그리고 이 순간, 야훼와 마몬 사이에서 또 하나의 신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에게 무정하며 그저 가만히 모든 것을 응시하고 체현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로서의 신. "까마귀가 / 웃는다 / 울기를: "그건 내 몫이지," 스스로를 검은 깃발로 흔들며". (테드 휴즈, <까마귀Crow> 中)
sf임?
ㄴㄴ 그냥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