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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는 프랑스의 문호 알베르 카뮈의 대표 저작이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테마인 ‘부조리’에 대해 심원한 탐구를 펼친다.
이 책이 서 있는 위치는 다소 독특하다. ‘부조리’라는 개념의 정체를 파헤치고 그것이 종국적으로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철학서로 볼 수도 있고, 동시에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유려하고 정제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적 텍스트로 볼 여지도 있다. 말하자면 철학적 산문시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부조리의 추론, 2부는 부조리한 인간, 3부는 부조리한 창조, 4부는 시지프 신화다. 1부인 부조리의 추론에서는 부조리가 무엇이며 그로부터 어떤 귀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러나 카뮈는 본격적으로 부조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앞으로 자신이 다루게 될 건 부조리의 본질이나 의미 따위가 아닌 부조리의 ‘느낌’, 즉 ‘부조리의 감성’일 뿐이라고 못을 박는다.
카뮈에게 부조리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어떤 보편적인 속성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 존재하는 모든 사건은 부조리와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으며, 부조리는 존재의 모든 곳에 뿌리를 박고 끝없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부조리를 마주치는 건 불가피하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부조리하다는 점을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거나 애써 모르는 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무지 인지하지 못하거나 모른 체할 수 없는 순간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들리기에 전처럼 애써 시선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런 순간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여 자신을 드러낼 수 있지만, 카뮈에 따르면 질문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라고 한다. 이를테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삶의 의미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가?”와 같은 의문이 전형적이다. 이 질문이 정신에 떠올랐다는 건 타성적 삶이 의식적 삶으로 전환하는 그 경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묵살하지 않고 진정으로 대면하는 순간에 인간은 부조리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의 정체를 어떠한 ‘절연’ 혹은 ‘이혼’이라고 규정한다. 이때 절연이나 이혼은 반드시 두 가지 항의 존재를 전제하는데, 그 첫 번째 항은 명확함을 호소하고 통일을 바라는 인간 정신에, 두 번째 항은 그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두꺼운” 세계에 해당한다. 카뮈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적대적 관계'로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사실인 '필연성'을 연역해 낸다. 인간과 세계는 이렇게 끊임없이 불합치하고 갈등하지만, 그 항구적인 대립이야말로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무의미한 우주 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카뮈는 부조리를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유일하게 자명한 진리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발견했으니 이를 끝까지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모든 추론은 유일한 자명성인 부조리에서부터 뻗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로 얻어 낸 ‘코기토’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이에 따라 부조리에 충실하게 논리를 전개하다 보면 반드시 다음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부조리는 결국 인간에게 자살을 명하는가, 아니면 살아갈 것을 명하는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이 책의 (다소 파격적인) 첫 문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씌어졌던 것이다.
이때 카뮈는 자신이 부조리라고 이름 붙인 그 진리이자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셰스토프와 같은 실존주의자들과 후설을 비롯한 현상학자를 언급하는데, 그들은 모두 부조리로부터 자기 나름의 희망적 귀결을 이끌어 내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카뮈가 보기에 그들의 귀결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비약했다. 부조리는 두 항의 관계성이다. 명확함을 호소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과, 죽음과 비합리가 도사리는 세계의 관계가 곧 부조리이다. 두 항 중 어느 하나라도 지워지는 순간 부조리는 해소되고 만다. 실존주의자들은 첫 번째 항인 인간을 지움으로써, 현상학자들은 두 번째 항인 세계를 지움으로써, 결국 부조리 자체를 지워버린다. 카뮈는 부조리라는 자명성 자체에 충실하길 원했다. 부조리를 해소하는 것은 결국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희망을 품고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은 그에게 있어 정당한 귀결이 될 수 없었다. 카뮈는 이러한 실존주의자들과 현상학자들의 비약을 두고 ‘철학적 자살’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이는 바로 (육체적, 생물학적) 자살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번에도 부조리는 자살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살이란 또 하나의 비약이기 때문이다. 자살은 부조리의 첫 번째 항인 인간을 지움으로써 부조리를 해소하고 문제 자체를 말소한다. 그러므로 자살은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때문에 그는 모든 형태의 자살을 거부한다.
따라서 카뮈는 “사막”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러나 명철한 의식을 지닌 채 어떠한 구원도 호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2부와 3부는 부조리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돈 후안과 배우, 정복자, 그리고 소설가를 들어 설명을 보충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지프 신화’는 책의 마지막 장에 와서야 나온다. 시시포스는 부조리한 형벌을 받는다. 그것은 자기 몸보다도 거대하고 무거운 바위를 산의 정상까지 가져다 놓아야 하는 형벌이다. 힘겹게 바위를 굴려 산정까지 가져다 놓더라도, 바위는 머지않아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는 또다시 산 아래로 내려간다. 다시금 바위를 정상까지 올려다 놓기 위해서다. 이는 1부에서 3부에 걸쳐 서술된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부조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즉 희망과 구원을 바라지 않은 채, 그곳에서 끝까지 버티는 삶. 그것이 시시포스의 삶, 부조리한 인간의 삶이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삶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발견해 낸다. 시지프 신화는 자살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행복한 시지프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의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희망도 없고 구원도 없는 오로지 양으로만 고려되는 세계.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공연한 시도를 하고 고통받는 인간. 부조리가 자명한 이치이고 그것의 귀결이 그저 버티고 사는 것임은 알겠지만, 그건 머리로 이해한 것일 뿐 나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이어서 카뮈의 또 다른 에세이인 반항하는 인간을 읽을 예정이다. (아마 나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되었을) 앞선 의문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없진 않지만, 카뮈 특유의 치열함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정말 받아들이면 내 인생이 디스토피아가 될 것 같은 느낌
카뮈의 반항,자유,열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가혹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ㄱ요
다시 한번 읽어보렵니다.. 그런데 쉽지 않네요 지금은 좀 이해가 되신 건가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방인을 읽고 뭔 생각으로 글을 쓴건가 해서 군대에서 부여잡고 읽었던 책인데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다가 글을 만났네요. 카뮈는 자신의 글에서 설명하는 완전히 부조리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모친을 염려하여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뫼르소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죠. 카뮈가 이런 생각에 왜 다다랐는지를 아신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대전으로 인해 죽었고, 어머니는 농아였습니다. 같이 살던 가족 중 할머니는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삼촌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고 그 누구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유년기의 카뮈는, 가정부 일을 하고 귀가하던 어머니가 강간당한 뒤 의사의 지시로 그 곁을 지키면서 ‘세상이 무너지는’경험을 처음 했다고 합니다.
재능 많고 무척 똑똑했던 그는 좋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업에 뜻을 가지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갑작스레 찾아온 폐렴은 카뮈의 학업도, 자신의 기쁨이었던 축구와 연극도 그만두어야만 하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이라면, 왜 살아야하는가? 앞으로의 삶에 고통이 기쁨에 비해 너무나도 자명하고 확실하다면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카뮈의 생각이 시작되었어요.
이런 카뮈의 어린 시절로부터 그의 철학이 출발했습니다. 절망뿐이었던 그가 자살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를 찾으면서요. 그의 대답은 ‘부조리한 삶, 부조리한 세상에서 유일한 의미를 가지는 방범은 부조리한 인간이 되는 것’ 이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시지프처럼, 부조리에 굴복하는 대신 저항하며, 향유하면서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글을 올리시면 답글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결혼, 여름>이나 <페스트>를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철학이 다분히 관념적으로 느껴지지만, 예정되어있는 병듦, 늙음, 고통,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며 다만 부조리에 저항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모두에게 주어지는 삶과 경험, 기쁨을 만끽하는 데에 살아있음의 의미가 있으므로 추구해야된다는, 단순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합니나.